우편물을 부치고 우체국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렀다. 오전 내내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상처받기 싫어 사랑을 거부하는 부유한 남자와 꿈같은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우연히 만나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로맨스 소설이다. 카페에는 그런 소설이 잔뜩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소설책을 읽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했다. 거리는 한산하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라지고 비둘기 두세 마리가 한가로이 음식부스러기 따위를 쪼아 먹으며 주변을 배회한다.
옆 테이블에서는 샤넬을 입은 여자와 디올을 입은 여자가 내 눈치를 살피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제우스라도 된다니?”
샤넬이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샤넬이 반응하기 직전, 그러니까 디올이 ‘머리로 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초현실적인 장면 하나가 떠올랐는데 나도 샤넬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제우스는 두 번 출산한다. 한 번은 머리로, 한 번은 허벅지로. 머리로 낳은 자식은 지혜의 신인 아테나가 되었고 허벅지로 낳은 자식은 쾌락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되었다.
수박만 한 아기를 낳은 여자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카페에 죽치고 앉아 나누는 대화치고는 의외라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내가 99번째 팔로워였어.”
“팔로워? SNS를 해야 하는 거야?”
“DM으로 소통하니까. 다만, 나이와 성별은 반드시 공개해야 돼. 그런데 팔로워를 보니까 십 대도 있고, 팔십 대도 있더라고. 남자, 여자도 가리지 않았어.”
한 마디로 디올은 제우스의 아흔아홉 번째 상대다. 디올은 자신과 불륜을 저지른 희대의 바람둥이를 입에 올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정도면, 범죄 아냐?”
샤넬이 속삭이듯 말했다.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나는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처럼 책을 읽는 척한다. 소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문율이 하나 있는데.” 디올이 뜸을 들인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 그와 무엇을 했는지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 돼. 불문율을 어기면 두 번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게 돼. 두 번 다시는.”
샤넬은 멍하니 디올을 봤다. 단꿈에 빠진 다나에의 얼굴이었다.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다? 마약 같은 존재네.”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해 다나에를 범하고, 임신한 다나에는 훗날 메두사를 처치하고 에티오피아의 공주인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를 낳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들 하잖아. 하지만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만이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법이지. 선택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나를 바꾸는 건 결국 선택이 아니라 용기니까. 나머지는 그저 운인 거야.”
“결혼하재.”
운전 중에 중학교 동창인 A에게 전화가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교차로 통과 직전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무시하고 가려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멈추어선 참이었다.
“맥주 한 잔 하자고 하길래 헬스장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 갔거든. 일본 사람이 하는 데 알지? 꼬치랑 오뎅탕이랑 이것저것 막 시켜놓고는 다 먹을 때까지 암말도 안 하다가 내가 더 시킬까요? 했더니 갑자기 그러더라. 결혼할래요? 어이가 없어서. 무슨 프러포즈를 오코노미야키 추가하듯이 하느냐고 했거든. 그랬더니 느닷없이 오코노미야키를 시키면 승낙으로 알겠다지 뭐야.”
그는 A가 다니는 헬스장의 트레이너다. 우리보다 다섯 살이 많고 누나만 넷이며 막내고 키가 그녀보다 작다고는 했으나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모른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땅딸막한 남자를 상상했을 뿐이다. A는 통화할 때마다 그에 관해 이야기했다. 누가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느니 그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 같다느니 아줌마들이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오코노미야키는?”
“안 시켰지.”
“왜?”
“두근거리지 않아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자리한 동네다. 도심과 떨어져 있어 인구밀도가 낮고 주변 환경이 쾌적한 데다 아파트들의 가격대비 평수도 컸다. 나는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결과적으로는 남편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최소량의 법칙 알지?” A가 말했다.
“필수 요소가 아무리 미량이라도 최소량에 미치지 못하면 전체가 결핍인 거야.”
식물은 부실한 필수 영양소가 하나라도 있으면 다른 좋은 영양소가 충분해도 그 부실한 만큼밖에 자라지 못한다. 최대가 아닌 최소가 성장을 결정했다.
“너한테는 그게 뭔데?”
“너는 어때? 지금 행복해?”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차로를 변경할 타이밍을 놓쳤다. 개천을 건너자마자 우회전이다. 교량이 끝나기 전에 맨 바깥 차로로 옮겨갔어야 한다. 사이드미러로 옆 차로를 살핀다. 차 두 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틈이 생겨 핸들을 꺾는다. 급하게 우회전을 시도한다.
그런데 교통섬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 마찰음이 비명을 집어삼킨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애타게 나를 찾는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멈춘 것을 확인한 뒤 기어를 P에 놓고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뗐다. 나는 무사하다. 처음으로 안전벨트가 생명줄임을 실감했다.
“나중에 전화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