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익스프레스 (2/6)

by 걍마늘

“괜찮으세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남자를 부축했다. 남자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처량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뒤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비상등이 위협적으로 깜빡거린다. 뒤차의 운전자는 참을성이 별로 없다. 남자는 무사히 인도로 올라섰다.

“차 좀 대고 올게요.”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로 돌아가다 도로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다. 빳빳한 루이뷔통 반지갑이다. 남자가 떨어뜨렸나 싶어 부르려는데 경적 소리가 혼이 빠질 만큼 시끄러워 일단 지갑을 주워 들고 차에 올랐다. 서둘러 교차로를 빠져나와 인도 옆에 차를 붙인다.

지갑 밖으로 납작한 무언가가 비죽 삐져나왔다. 일고여덟 살쯤 된 여자 아이가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이다. 아빠를 닮았나. 포켓에 꽂힌 검은색 카드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슬쩍 꺼내보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다. 실물은 처음 보았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물건이 아니다. 뒤를 보니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차에서 내려 남자에게로 갔다.

“떨어뜨리셨어요.”

남자에게 지갑을 건넸다. 이제 보니 구찌 저지에 구찌 스니커즈를 신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남자는 묵묵히 지갑을 살펴보았다.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듯해 기분이 상하기는 했으나 어쩌랴. 나의 과실을 증명할 증거가 블랙박스에 남았다. 특별히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괜한 오지랖인가 싶다가도 정말로 병원에 가자고 하면 어쩌나 정말로 어딘가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운이 나빴다면 죽었을 수도 있다.

남자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침묵이 길어진다. 사연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사진 속의 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식이거나 그가 어렸을 때 죽은 동생일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을 지켜 주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지갑에 도로 사진을 넣었다.

“병원에 가 보시겠어요? 다니는 병원 있으세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점심은 드셨어요?”

“아니요, 아직….”

“그럼 제가 살게요. 마침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남편은 텍사스로 출장을 갔다. 오전에 부친 우편물은 남편이 놓고 간 서류다. 출장 기간은 15일이고 오늘은 닷새째로 귀국은 열흘 뒤다. 이러한 사실이 나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감사합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눈을 피한다. 어떤 눈은 한마디 말보다 진실했으며 어떤 눈에는 백 마디 말보다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근처에 점심 뷔페 괜찮은 데가 있어요.”

남자가 차에 오르자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가 났다. 한여름의 뭉게구름처럼 밀려드는 향기가 차 안의 공기를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오와 몰래 사랑을 나누려는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구름으로 변신한다.

비상등을 끄고 깜빡이를 켰다. 핸들은 이미 왼쪽으로 꺾었다. 남자는 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제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면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 모든 운명은 사후적이다. 겪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나가기 전에는 결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