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익스프레스 (3/6)

by 걍마늘

“스무 살 때 잠깐 사귄 여자애가 있습니다. 저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자애는 빵집으로 현장실습을 나온 고등학생이었죠.”

남자는 애피타이저로 라코타치즈 샐러드와 크루아상을 골랐고 나는 요거트 드레싱을 듬뿍 넣은 연어 샐러드와 브로콜리 수프를 가져왔다. 피크 타임이 지난 시각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은은히 들려왔다. 신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부모님은 끝까지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죠. 여자애를 만나서 돈을 쥐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깐 엄마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절대 아빠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엄마는 아빠와 다투고 나면 눈에 불을 켜고 내 꼬투리를 잡았다. 사춘기 때는 그냥 지우지 그랬느냐 대들기도 했었다. 아빠는 만만한 암컷을 찾아내는 레이더 같은 게 달린 사람 같았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한 수많은 암컷들 중 하나이면서 어리석게도 아빠의 아이를 밴 유일한 암컷이다. 결혼하자고 매달린 쪽은 오히려 아빠라는데 엄마는 아빠의 태도를 진심이라 믿었고 결국은 속았다. 엄마가 우울증 약으로 버티며 술과 담배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다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아빠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집에 있는데도 대놓고 집 안으로 암컷을 끌어들였다.

“솔직히 저는 낳지 않길 바랐습니다. 여자애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죠. 아이는 나중에, 그러니까 둘 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다시 가져도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습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연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늘어놓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왜인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먼저 사진에 대해 물은 것이다. 분위기가 어색해 꺼낸 말인데 더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죠.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여자애가 그러더군요. 이제부터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다. 두 번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궁금해하지도 말아라.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남자는 포크로 라코타치즈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브로콜리 수프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숟가락으로 브로콜리 조각을 휘저으며 최소량의 법칙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최소 요구량에 미치지 못한 필수 요소가 무엇이었을까.

“그럼 사진 속 아이가…?”

“며칠 전 어머니가 갑자기 병원으로 저를 호출했습니다.”

“병원이요?”

나는 추측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계시거든요. 지금 당장 돌아가셔도 놀라울 게 없는 상황이라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달려갔는데 어머니가 다짜고짜 이 사진을 내미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요. 처음에는 웬 아이 사진인가 싶었습니다. 뒷면에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죠.”

남자가 사진을 뒤집었다. 그가 말한 대로다.

“어머니가 몰래 여자애를 만나고 온 거죠. 아이도 함께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주변 정리 중인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나 싶기도 했지만,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모든 책임을 저한테 떠넘기는 것 같았죠. 이 사진 한 장으로요.”

“전화는 걸어 봤어요?”

테이블이 진동한다. 휴대폰을 슬쩍 뒤집어보니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다. 남자가 조용히 일어섰다. 편하게 통화하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모양과 손짓으로 음식을 가지러 간다고 한다. 그러나 통화 버튼과 거절 버튼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고민한다. 계속되는 진동에서 어떤 절박감을 감지했다. 반드시 지금 통화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