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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식 Jul 22. 2015

전세계약 직전, 부동산을 뛰쳐나왔다

#4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일요일 밖에 나왔는데, 집주인 쪽 부동산공인중개사가 전화했다. “손님이 왔는데 빈 집을 봐도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집이 엉망이었다. 지금껏 깨끗하게 청소한 우리 집을 본 사람 중에서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오늘은 기대를 접어야 했다. 심드렁하게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 공인중개사가 다시 전화했다. “계약한대요.”     


계약날짜는 두 달 뒤로 정해졌다. 그때까지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한다. 최근 두 달 동안 많은 집들을 봤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아니, 전셋집 자체가 거의 없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냈다. 아내와 함께 은평구 쪽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내가 아이를 안았다. 날씨는 후텁지근했고, 아이는 칭얼거렸다. 공인중개사무소 몇 군데에 연락처만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응암역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들어갔다. 사정을 얘기하자, 어제 나온 전셋집이 있다고 했다. 교통이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나중에 좋은 전셋집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려다가, 이왕 온 거 한 번 보기로 했다. 그래야 은평구 쪽 전셋집 시세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한 빌라 앞에 내렸다. 문을 열었더니,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우리 아이와 생일이 비슷해 보였다. 거실에는 우리 집에도 있는 장난감이 눈에 보였다. 우리 부부가 탐내고 있는 ‘위고’도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 우리 집이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은 깨끗하고 넓었다. 맘에 들었다.      


이 집을 보고 난 후 내 통장에는 수백만 원이 찍혔다. 현재 집주인이 새 전셋집 계약할 때 계약금으로 쓰라고 전세금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은 운때가 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두 달가량 집을 구했지만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우리 집이 나간 후, 첫 번째로 찾아간 공인중개사무소에서 본 첫 번째 전셋집이 맘에 들었다. 동시에 집주인은 계약금을 보내왔다.      


그날 다른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 전셋집 몇 군데를 봤지만, 첫 번째 집보다 맘에 드는 곳은 없었다. 아내와 논의 끝에 계약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외식을 하면서 축배를 들자고 했다. 아이를 안고 땡볕에서 집을 구하러 다니던 지난 두 달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내에게 미리 “고생했어요”라고 말했다.      


집 근처에 신축 빌라 공사하는 곳이 많지만, 전세는 거의 없다(사진 속 건물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그날 저녁 집주인이 될 사람 쪽의 공인중개사무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계약할 집의 등기부등본을 봤다. 대출 1억4000만 원. 전화로 “대출을 다 갚았거나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과 달랐다. 공인중개사 쪽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항의하니, 내가 낼 전세금으로 대출금을 갚으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대출이 없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집이 팔리기 전에는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세계약 만료일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뒤에야 이사를 하게 됐다. 대출이 많이 있는 집을 계약할 경우, 전세금을 받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폭탄’이 터졌다. 잠시 외출한 집주인 쪽 공인중개사를 제외한, 우리 쪽 공인중개사, 집주인, 세입자가 될 우리 식구가 마주 앉았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가 전세자금대출을 설명하며 전셋값의 5%를 계약금으로 내야 한다고 언급하자, 집주인은 “계약금은 10%로 해야 한다”면서 불같이 화를 내고는 중개사무소를 나가버렸다.      


아내는 내 팔을 잡으면서 불안해했다. 우리 쪽 공인중개사는 “불안하면 계약하지 말자”고 했다. 계약을 포기했다.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참 허망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힘을 냈다. 아이는 엄마 아빠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집에 갈 때까지 잘 안겨 있었다. 그날 밤 아내와 맥주 한 잔 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괜찮은 집, 나타나지 않겠어요?” 다소 우울할 땐 힘이 되는 시를 소개한다.     


말의 힘 /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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