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의 Oct 27. 2015

지금도 기억하는 그녀의 눈물

만나지 말았어야 할 만남이었기에

때는 1993년, 벌써 22년 전의 기억이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준다는 대학의 정치학과에 지원했으나 보기좋게 낙방했고, 당시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던 누나 남자친구의 권유로 갑작스럽게 미국 유학길에 몸을 싣게 되었다.


고교시절 성적은 꽤나 잘 나왔고, 특히 국어, 영어를 워낙 좋아했기에 워싱턴D.C에 소재한 조지타운대학교(Georgetown Univ.)에 있는 어학연수프로그램에서 최상위반에 배치되어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부터 미국신문을 가져다놓고 줄줄 읽으며 수업하는데, 뭔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던 그 난감함이란.. 첫 수업날, 이제 갓 고교를 졸업한, 게다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그 낯설고 머나먼 타국의 작은 공간에서 외국인들과 첫 대면을 해야하는 스트레스란 실로 엄청났다.


조지타운대학교. 포토맥강 근처에 있어 경관도 아름답다


하지만, 이런 나의 스트레스를 일소에 날려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 리오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그녀. 주벼인들은 안보이고 한 사람에게서만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날 저녁부터 난 나보다 한참 형이었던 일본인 룸메이트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갓 스무살의 숙맥이었던 나는 어떻게해야 일본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맥주중독자였던 그는 매일 맥주캔 여러개를 사와서 혼자 마시면서 내게 이런저런 상담을 해주던 기억이 난다. 테니스를 무척 잘 쳤고 여느 일본인들이 그러하듯 무척 친절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설레임과 조급함이 공존하던 어느날, 카페테리아에서 다소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수업을 들으러 종종 걸음을 재촉하고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내귀를 마구 어지럽힌다.


" ○○는 좋겠네, ○○는 큰일났네 "


나랑 동갑내기이자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여자였는데, 한 번은 좋겠다 그랬다가 또 한 번은 큰일났다 그러고, 저 말을 계속 반복하니 그냥 장난치는 거겠거니 생각하면서도 궁금증이 치솟지않을 수 없어 발걸음을 돌려서 다가가 무슨뜻이냐고 다그쳐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충격 그 자체다.


" 리오랑 밥먹으며 들었는데, 리오가 널 좋아한대. "


헉! 내가 좀 멋있고 똑똑해서 어쩌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니 이 보다 기쁜일이 또 있겠는가?난 애써 태연한척 물었다.


" 근데 그게 왜 큰일인데?"

" 리오가 알고보니 유부녀래. 그리고 나이는 29살이고. "


식스센스 영화찍자는 것도 아니고, 단 몇 초만에 날 천당과 지옥행 왕복열차에 태우고있으니, 돌덩이로 뒷통수를 두들겨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내가 그토록 가슴앓이하던 그녀가 기껏해야 서너살 연상이라 생각했건만 무려 아홉살 차이에 심지어 유부녀였다니... 그래놓고 내가 좋다고한들 운명의 장난밖에 더 되겠는가?젝일, 내게 종교라도 있었으면 신을 원망이라도 할텐데...


그날 이후로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틈만 나면 그녀생각하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 슬쩍슬쩍 그녀 동향만 살피던 내가 이제 그녀를 슬슬 피해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인가?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늦은 시각 갑자기 기숙사앞으로 찾아왔다. 내가 피해다니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나보다. 한밤중인데다 방학기간이었기에 인적이 뚝 끊긴 캠퍼스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순진했던 나는 그녀손에 이끌려 한여름밤 갑자기 장대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잔디위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내몸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덜덜 떨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이었는지, 어린 마음에 갑작스레 닥친 당황스러움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잔디가 양탄자처럼 잘 가꿔져있어서 나도 잔디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대박사건이 터지고 며칠이 또 지나갔고, 난 학교앞에 있는 툼(tomb)이라는 학생들이 자주 찾는 술집에서 외국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술을 마실 수있는 나이가 안되었기에 팔뚝에 미성년표시 도장을 쾅 찍힌 채 콜라를 마시면서 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리오가 날 찾아왔다.


" 훈, 나 모레 뉴욕으로 떠나. 이틀 정도 머물다 일본으로 갈거야. "

" 그래? 나도 마침 내일 뉴욕에 사는 누나집으로 갈건데 잘 됐네. "


 내말을 듣고 뉴욕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다며 날듯이 좋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내게 누나집 전화번호를 적어달라했고, 아무렇지않게 쪽지에 번호를 적어주다 순간 엄청난 부담감이 음습해오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일본으로 영영 돌아가는 그녀인데, 떠나는 날,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날 슬퍼하는 그녀를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적다가 끝자리 두 자리를 거짓으로 적어주고 말았다. 그 쪽지를 받고 싱글벙글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울컥했지만, 이 또한 내가 감내해야할 몫이었다.


몇달만에 다시 찾은 뉴욕의 맨하튼 거리는 역시나 압권이었다. 특히 공항에서 차를 타고 도심을 향해 바라보는 야경은 익히 알고있듯 황홀함 그 자체이다. 우리나라에 오면 김치나 마늘 냄새가 난다는 말에 수긍이 가는 것이 이곳 거리에서는 치즈내음이 나는듯 하다.


누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있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누나가 전화받더니 나 찾는 전화라며 받으란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고, 설마 설마를 읇조리며 받았다.


" 훈, 나야. 나 뉴욕에 도착했어. 여기 ○○호텔인데 지금 올 수 있어? "

" 어? 어. 그, 그래. 알았어. "


분명히 뒷자리 번호 두 개를 거짓으로 적어줬는데 어찌된 일이지? 그리고  왜 번호를 속였냐고 따지기는 커녕 마냥 반가워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렸을때 죄짓다가 선생님께 들킨 그런 심정이었다.


이틀후 드디어 그녀가 귀국하는 날이 되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저녁이라 맨하튼 중심부에 위치한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우린 아침을 함께 먹었고, 밥먹는 모습이 서투르다며 나를 보며 깔깔 웃던 그녀의 모습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렇다, 난 외국음식 먹는 요령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아직 너무 서투르기만 한 이제 겨우 스무살 아니었던가?식당에서 나와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 말없이 맨하튼거리를 함께 거닐었고, 난 크게 결심하고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 리오, 실은 내가 지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가봐야하거든. 공항에 가기전까지 몇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자유의 여신상 구경이라도 가봐. 내가 가는 방법 알려줄게. 저기에서 메트로를 타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젠장할 나한테 어쩌란 말인가?지금 생각해보면 공항에서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함께 있어주고 배웅해줬더라면 후회가 밀려들지만, 그 때는 그것이 왜 그리도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너무 어려서 그랬으리라. 눈물 흘리는 그녀와 한낮의 분주한 맨하튼 횡단보도앞에서 우리는 뜨거운 작별의 입맞춤을 나눴고, 온갖 감정이 뒤죽박인 채 난 차갑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난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역이 맥아더 블루버드로 기억하는데 암튼 학교근처에 있는 곳에 원룸을 임대했고, 그간 엄마가 한국에서 다녀가시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있던 어느날 집앞 우체통에 한통의 편지가 꽂혀있었다. 누가 보냈을까 편지봉투를 살펴본 순간 난 내 두눈을 의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발신자에 분명 리오 라고 적혀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난 번 누나집 전화번호건도 그렇고, 이쯤되면 그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혹시 리오는 CSI요원?생각해보면 집주소는 리오와 내가 동시에 아는 친구를 통해 얻었을 수도 있을테니 크게 놀랍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뒷자리번호를 그것도 두 자리나 틀리게 알려줬는데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큰 의문으로 남는다. 짐작컨대, 내가 잘못 알려준거라 생각하고 뒷자리 0부터 9까지 다 전화해보고, 다시 00부터 99까지 걸어봤으리라.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었을까?그런 생각을 하자니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무척이나 죄스럽고 뭉클해지는 느낌이다.


편지의 내용 중에는 충격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신을 했는데, 앞날이 창창한 나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고싶지않으니 염려말아라, 자신이 사는 현에서는 낙태를 하려면 상대방 남성의 동의가 필수인데, 친한 홍콩친구가 대신 그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는. 이것이 지금 기억나는 편지의 내용이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아픈 눈물을 흘렸었는지......



내 나이 이제 42세. 저 때가 22년전이라니 세월의 덧없음에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정확히 50세가 되었을테고, 부디 행복한 나날들을 영위하고 있기를 이런 말할 자격조차없는 내가 간절히 바래본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날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애써 못 본척하고 차갑게 뒤돌아선 나였지만, 22년이 흐른 지금도 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있다 주룩주룩 비라도 내리는 그런날이면 한 번씩 그 눈물이 내 마음속에서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바다건너 전해주고만 싶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