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 내가 있다.
그 유명한 드라마 속 대사,
“내 안에 너 있다.”
무심한 듯 건네지만, 그 말 한 줄에 온몸이 달달함에 빠지게 된다.
여자는 안다. 그 말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심장을 툭 건드리는 고백이라는 걸.
요즘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
그래서일까, 나는 ‘덥다’ 대신 이렇게 중얼거린다.
“여름 안에 내가 있다.”
그러면 왠지 여름이 내게 다가와, 나를 품어줄 것만 같다.
감았던 눈 한쪽을 살짝 열자, 눈꺼풀 사이로 강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빛의 끝이 눈동자에 찌릿 닿고, 뜨거움이 속눈썹마저 달궜다.
습한 공기 위에 얹힌 여름 햇빛은 사람을 무겁고도 지치게 한다.
마치 모래 위에 올려진 돌처럼, 내 몸도 서서히 달아오른다.
분홍색 원피스 수영복 위에 비치타월을 걸치고 해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른이라면 20분이면 충분할 길, 꼬마였던 나에게는 족히 30분은 걸렸다.
신부산 교회의 벽돌 벽을 지나고, 아스팔트 위로 번지는 열기를 느끼며,
광안리 횟집 골목의 비릿함을 지나 민락동 회센터 근처의 광안리 해변 끝자락에 다다른다.
그 길은 내 어린 시절 여름의 전부였다.
어쩌면 대견하고도 용감한 여정이었지만, 그때의 우리는 여름을 향해 주저 없이 걸었다.
손바닥으로 모래를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파고 또 파던 모래구덩이 속, 뜨거운 모래가 발목을 감싸며 땀을 쏙 빼주었다.
찜질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그 느낌은 마치 모래가 내 열기를 삼키는 듯했다.
햇볕에 익은 모래 위로 무릎을 꿇으면, 뜨거움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조금만 파 내려가면, 바닷물 냄새와 함께 차가운 속살이 손끝을 간질였다.
모래 알갱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누가 더 깊이, 더 빠르게 팔 수 있는지 경쟁하며, 숨이 차오르는 순간조차 즐거웠다.
여름은 소리로도 다가왔다.
매미의 울음은 마치 누군가 치는 북소리처럼 한결같이 울려 퍼지고,
간간이 풀벌레가 잠시 존재를 알리다 멈추는 순간, 공기가 더 고요해졌다.
밤이 되면 원두막에 앉아 별을 셌다.
‘엥—’ 하고 나타나는 모기의 얄미운 비행음도, 그 순간만큼은 용서가 됐다.
차가운 맥주를 목구멍 깊이 넘기며, 나는 마치 원주민이라도 된 듯 바람과 별의 주인이 됐다.
여름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 소리에 둘러싸이면,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여름은 비로 완성됐다.
갑자기 시작된 빗줄기가 원두막의 지붕을 두드리며 여름을 시원하게 장식한다.
그 순간, 소설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가 떠올랐다.
우산도 없이, 비를 피해 뛰던 그들의 숨소리와 빗방울이 모든 말을 대신하던 여름날.
나 역시 오늘, 그 빗소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 있었다.
‘삐삐삐…’
급히 주황색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삐삐에 찍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때의 마음이 첫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짧고 아픈 풋사랑이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다만 알았다. 사람 마음이 내 마음처럼 겹치기는 어렵다는 걸.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이제, 그만 만나자.”
수화기 너머로 말을 던지고 돌아서자, 하늘이 무너진 듯 빗물이 쏟아졌다.
그 한여름의 소나기는 내 마음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
이번 주 나흘 동안의 휴가는, 말 그대로 단비였다.
처서가 가까워서인지, 며칠 전보다 바람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멀리 떠나는 대신, 나는 집 안에서 여유를 누리기로 했다.
에어컨 바람 속에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읽고 싶던 책을 펼쳐보다 졸음이 오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국물 떡볶이에 삶은 계란, 거기에 라면 사리까지 넣어 끓였다.
뜨거운 국물에서 올라오는 매콤한 향이, 입안 가득 여름을 채웠다.
넷플릭스 영화 한 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오후.
시간은 길 것 같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지듯 아쉽게 흘러갔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내가, 오히려 더 많은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되었다.
꼭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건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여름의 휴가였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하며 맥주 한 잔 기울이는 소소한 이벤트까지.
여름 안에 있었던 나의 기억을 한 모금씩 꺼내 마시듯,
뜨거운 날 차가운 맥주가 주는 반가움이 유난히 깊게 스며든다.
나는 지금, 잠시 쉬어간다.
유년의 모래, 청춘의 빗물, 오늘의 바람.
여름은 해마다 얼굴을 바꿔가며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여름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