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터에서 정착을 도와준 친구들 몇몇에게 선물을 건넸다. K-뷰티를 상징하는 마스크팩과 한국 스낵이 대부분이었지만, 한 친구에게는 티스푼과 포크세트를 건넸다. 무척 고마워하던 그 친구는 다음날 내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그 포크들은 뭐 할 때 쓰는 거냐고...
집주인이 디폴트로 갖춰둔 식기세트를 봐도, 여기 포크는 크기가 다양하긴 하지만 보편적인 것은 20cm 안팎이다. 가장 작은 것도 13cm 남짓 된다. 이런 큼지막한 포크에 익숙한 친구 눈에는 기껏해야 손가락 크기에 불과한 포크가 신기하면서도 당혹스러웠던 거다.
한국의 과일 먹는 방식을 알려주면서 과일조각을 집을 때 사용하면 된다고 말해줬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 특히나 문화가 다른 누군가에는 굉장히 낯설고 이색적인 모습으로 비친다는 걸, 매일매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파리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사진에선 멋지기 이를 데 없는 오스만 스타일의 파리 집은 100년 이상 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오래된 만큼 손볼 곳도 만만치 않다. 천장이 주저앉았다는 경험담도 심심찮게 들리고, 배관 문제로 바닥공사를 하면 완전히 교체하는 데 1년이 걸리곤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입주 전 집 상태를 확인하는 에따델리유 절차가 굉장히 깐깐하다. 보통 월세 두 달 치를 보증금으로 지불하는데, 퇴거 시에 입주 시 사진과 조금이라도 달라진 부분이 있으면 보증금이 왕창 깎인다. 출국 전부터 에따델리유에 얽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기에 나름 꼼꼼하게 사진을 찍어뒀다.
내가 살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창문은 거의 떨어질 것처럼 간신히 붙어있고, 블라인드는 제대로 내려오지 않았다. 문 손잡이는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마룻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폐가를 방불케 했다. 거실과 안방 마루는 어찌나 얼룩도 많은지. 계란프라이 하는데 무려 10분 이상이 걸리는 성능이 역대급으로 낮은 인덕션 때문에 생식을 해야 하나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일상이 하루 이틀 더해가면서 '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 차츰 '정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내 눈에 아슬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던 창문은 유럽식 창문에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손잡이를 위로 돌리면 창문 위쪽이 열린다. 마치 창문이 빠질 것 같지만 방충망이 없기에 환기용으로 쓰기에는 제격이다. 손잡이를 아래로 향하게 하면 창문이 닫히고, 수평으로 하면 일반창문으로 쓸 수 있다.
내리는 법을 배우고 나니 고장 난 블라인드라고 생각했던 게 사용하기 가장 편한 가림막이 되었다. 오래된 집이라 뻐걱거리는 소리를 없앨 수는 없기에 그저 파리 특유의 ASMR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편했다. 마룻바닥 얼룩이라 생각한 것 중 상당수는 나무 고유무늬였다.
인덕션이라고 생각했던 전기레인지는 알고 보니 하이라이트였다. 한국에서 쓰던 가스레인지와 강약 조절방향이 반대인 걸 모르고 11시 방향에 맞춰 요리를 했는데 가장 약한 강도로만 이용했던 거였다. 1시 방향으로 손잡이를 돌리니 빨간 열선이 그제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연결된 TV를 켜니 광고마저도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LGBTQ에 포용적인 나라답게 동성연인 간의 키스장면이 광고에 등장한다. 햄버거 광고에는 하단에 "건강을 위해 하루에 5번 과일과 채소를 먹으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초콜릿 광고에도 "건강을 위해 식사 중간에는 간식을 삼가라"는 자막이 뜬다. 답배갑 흡연 경고 사진만큼 무시무시하진 않지만, 충동구매 전에 한 번쯤 망설일 수는 있을 듯싶다.
올림픽을 앞두고 그 많은 노숙자들을 파리 외곽으로 몰아냈다고 하지만, 개막식이 끝나고 나니 이제 하나 둘 노숙자들이 귀환(!)하고 있다. 출근길에 자주 보이는 노숙자는 3대에 걸친 5인 가족이다. 매트리스 위에 차린 살림규모도 어마어마하다. 공공화장실이 딸린 지하철 역 한편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굴하지 않고 아침단잠에 빠져있는 노숙인이 의아해 보였는데, 이제는 그들의 매트리스 근처로 발걸음을 하면 그 가족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 같아 빙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선 흔히 보이는 길냥이가 거의 안 보이는 것도 신기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프랑스인 중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유기묘가 흔하지 않다는 건, 파리인들이 책임감 있게 반려묘와 끝까지 함께 하기 때문이겠지?
다른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왕의 전유공간이었던 궁을 일반 시민에게 돌려주는 건 한국과 같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 점심시간 때 종종 회사 바로 앞에 있던 경복궁을 거닐곤 했었다. 이제는 주말에 도보로 30분이면 닿는 뤽상부르 정원을 거닌다.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정취를 담은 뤽상부르 궁을 조성하지만, 권력암투에서 밀려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 명소에 가면 한국에서도 사랑 언약의 징표로 곧잘 등장하는 수많은 자물쇠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한국과 다른 건 높다란 건물을 잇는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신발이다. 파리엔 전봇대나 전깃줄이 없지만, 아주 가끔 건물 사이를 잇는 기다란 줄이 보일 때가 있다. 팩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연인끼리 서로 이름을 신발에 적어 줄에 던져놓는다고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 비슷해 보이는 것도 꽤 있지만, 파리지엔느로 이제 만 2주를 넘기고 있는 내 눈에는 아직 이런 공통분모보다는 상이한 점이 더 잘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감탄사를 자아내는 순간들이 어느새 무미건조하게 다가오겠지? 익숙해지기 전에 전두엽에게 놀랄만한 경험을 충분히 선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