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자 도덕경으로 읽는 현대인의 삶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by 아레테 클래식


@노자 강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도덕경은 노자의 철학과 정치학적 사상을 기술한 책이다. 노자의 성은 이(李) 또는 노(老)라고 하고 이름은 이(耳) 또는 담(聃), 자는 백양(伯陽)으로 노양자(老陽子)라고도 불린다.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 태생으로 그의 집안은 신분이 높은 귀족이었다고 알려진다.


노자는 한때 주나라 왕실의 도서 관리자로 일하다가 정치적 문제로 노나라로 망명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정치적 입장은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당시 17세였던 공자가 주례(周禮)에 대해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노자의 나이는 공자보다 20세 정도 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공자와 노자가 동시대 인물이 아니었고 노자가 훨씬 이후의 인물이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위키피디아, 도덕경 죽간본(대나무에 쓴 도덕경)

노자가 말년에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려 할 때 관지기 윤희가 그를 존경하여 한 권의 책을 얻고자 거듭 간청하니, 노자는 그곳에 머물면서 도를 설파하고, 단숨에 5천 자에 이르는 책을 써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 도덕경에 대한 설명 중》




〈도덕경〉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저술로, 도(道)를 중심으로 만물의 기원, 도덕, 정치, 철학 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도덕경의 경은 경전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세계 여러 종교의 존중을 받는 본문이나 거룩한 문서를 뜻한다. 도교라는 종교를 파생시킨 의미에서 도덕경은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거니와 사상적으로도 높은 경지에 이른 책이므로 경이라 불리는 것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도덕경>이 노자가 실제로 저술한 것인지, 노자의 제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많다. 하지만 노자가 단숨에 5천 자를 썼다는 것은 그저 그를 칭송하기 위해 고안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경전이 스승의 사후에 정리되는 경향이 있는 걸 보면 사후에 집대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 후 전국 시대 때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면서 노자의 사상은 노장 사상으로 확장되었다.


보통 노장 사상은 현실 도피 철학, 자연 철학 등 은둔자의 철학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무위자연 등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노장 사상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해 자연에 귀의하자는 식의 철학이 아니다. <도덕경>을 한마디로 어떤 책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도덕경>은 어떤 책인가?


<도덕경>에 대한 설명을 위해 철학과 사상이 다루는 주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양철학사를 이해할 때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 중 하나는 절대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 세계를 이루는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중세와 근대에 이르면서 이는 ‘절대적 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동양의 사상은 서양철학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다. 국가의 체제나 계급 구조 등에 대한 이해와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찾는 것이 동양과 서양 사상의 공통분모와도 같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주나라까지 천명(하늘의 명령)과 천자(하늘의 아들)라는 절대적 지배체계와 지배자의 구조를 바탕으로 국가가 존립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절대적 권위(천자)는 극복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상실된 지배권력을 대체해야 하는 정치적 당위와 이론적 근거가 필요했다. 상주(商周) 시대를 지탱해 왔던 신화적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정치 · 사회적 질서(천도)가 해체되면서 그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의 원리와 세계관이 모색되었다. 고대 중국의 대변환기인 춘추전국 시대에 그 지배 논리의 제공자로서 공자, 노자, 묵자, 순자, 맹자, 장자 등의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정치적 격변기에 동양사상의 초석이 되는 공맹과 노장사상이 꽃피웠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공자나 노자는 고대의 천명론을 극복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모두 개혁적이다. 여기는 하늘의 뜻인 천명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탱하는 위대한 힘이기는 하지만, 그 천명을 행사하는 천자의 의지라는 점에서 임의적이고 다분히 주관적이다. 하늘의 뜻과 천자의 실행 사이에 어떤 논리적 연결 고리 없이 신화적인 해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자는 인간 내면의 가치를 긍정한다. 천명이라는 주관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의 덕을 인(仁)으로 보았으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을 통해 인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덕규범으로서의 인을 정치사상에도 투영시켜 새로운 왕도를 정립했다. 공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야만 질서가 확립되고 명분이 바로 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위정자는 인과 덕이 있어야 하며, 예로써 다스려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다. 위정자가 인과 덕, 예를 중요시하면 자연히 백성도 이를 따르게 되어 나라가 널리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나라 안이 평화로워야 혼란한 시대도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가 주창했던 인도(仁道)는 결과론적으로는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시작점을 보면 인(仁)이 정말 인간의 보편성에 기초한 객관적인 가치인지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할 때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바탕으로 했으나, 결국은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공자의 보편적 개념은 결국 사람 간의 합의(인위적)된 것일 수밖에 없고, 그 합의된 기준을 적용하게 되면 결국 천도가 범했던 것과 유사하게 임의성으로 인한 구분, 배제, 억압, 폭력의 구조를 피할 수 없다. 즉, 실재하지 않는 인(仁)이라는 보편적 질서를 사회적으로 강요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노자는 이와 달리 인간의 주관성을 완전히 탈피해 자연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노자 도덕경의 나오는 천도 무친(天道無親)이라는 개념은 자연의 도는 친하고, 안 친하고가 없다는 주장이다. 천도는 그냥 존재하는 법칙일 뿐 사람의 편도 아니고, 사람의 편이 아닌 것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생각한 인도(人道)는 자연 세계에 속한 인간의 질서를 발견하는 철학이다. 유가사상과 달리 도가는 인간의 주관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연의 객관성에 기초해 인간의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하자는 말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 없는 자연의 운행 원리가 인간의 본성과 합치하는 도라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객관적인 것이고 누구에게나 투명하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문장을 살펴보면 노자의 입장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노자가 얘기하는 무위(無爲)는 자신을 억지로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문자적으로 이것만 본다면 무위는 신선놀음하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문장 전체를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즉, 무위를 통해서 무불위를 성취한다는 뜻이 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무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을 이루는’ 성취를 이루라는 뜻이다. 격변했던 춘추전국의 시대에 맞서 노자는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변화하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깨닫고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주관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의 변화에 유연해질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의 사상은 다분히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운행 원리인 자연법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인위적이지 않고 원래 있는 그대로 존재하던 더 큰 체계와 그림을 보여준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노자를 얘기하면 노자의 사상은 너무 뜬 구름 잡는 얘기라 잘 이해가 안 된다거나, 유유자적한 신선의 이야기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의 사상은 뜬 구름 잡는 얘기도 세상을 등진 신선의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노장사상은 현대 철학적 담론과 매우 닮아 있다. 나는 최근 세상의 실체가 신 또는 적대적 이성이 중심 되어왔던 근대 이전의 철학과 경험과 실존이 중심이 되는 현대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공부 중이다. 그리고 BC 6세기경에 활동했던 동양의 학자가 주장한 무위자연의 개념(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화한다는 자연의 법칙)이 현대 철학적 접근과 매우 유사한 개념임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노자 <도덕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사회의 고도로 분화되고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이라는 다원화된 큰 시대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현대화된 사회는 좀 더 다양해지고 분화되기보다 오히려 거대해지고 체계화되었다. 그 거대한 구조 속에서 개인은 기계의 부속처럼 소외되고 더 체계적인 통제하에 놓인 형국이다. 노자가 꿈꾼 세상은 인위적인 통제 일변도의 시스템이 아니다. 그는 각자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기초가 되는 그야말로 자연의 법칙이 통치의 원리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이 스스로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는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 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보편자나 보편적 개념을 통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때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나가지 못하는 인생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타인이 원하는 가치와 높이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삶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노예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진정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자기의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일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고 유행가의 가사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임을 잊지 않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도덕경> 읽어야 한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가 던지는 질문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말은 ‘너는 세상의 보편적 기준에 기대어 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세상의 기준이 되어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세상의 위대함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고,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걸음이 바로 역사이다. 세상의 기준이 되어 살고 싶은가? 그럼 당장 도덕경을 읽어라. 그리고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라.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에서 함께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계몽령? 대통령의 정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