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와 건국전쟁을 보고 와서
지난 주말에 파묘를, 어제는 건국전쟁을 보고 왔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파묘는 영화평이 좋아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건국전쟁은 총선을 앞두고 너무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급히 관심이 생겼다. 오늘 나의 영화를 볼 독자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 두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겠다.
영화와 다큐의 내용이 궁금하면 이것을 다룬 자료는 차고도 넘친다. 굳이 내가 작품해설 자체를 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평은 나의 감상을 보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최소화할 예정이다. 작품 내용이 궁금하면 극장을 가든지 기다렸다 OTT 서비스로 시청하시면 좋겠다. 꼭! 다른 사람의 작품평은 언제까지나 부가적인 것이다. 내 눈으로 보지 않은 작품을 전해 듣는 것은 그저 참고만 하면 된다. 내 글도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영화(파묘)와 다큐(건국전쟁)라는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을 보고 난 후 나의 감상은 이렇다.
파묘: 정치적 의도는 잘 숨겨둔 채, 재미와 의미를 모두 보여준 나쁘지 않은 영화
건국전쟁: 다큐적 사실을 잘 숨겨둔 채, 하고 싶은 말을 만들어 보여준 재미도 의미도 잃은 영화
나는 파묘를 관람하고 이 영화가 오컬트에서 다소 허황된 SF로 마무리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건 뭐지 싶었고. 한편으로 황당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숨겨진 의도였다는 것을 알고 물개 박수를 쳤다. 파묘의 감독은 역사적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 중반 이후까지 철저히 숨긴 채 작품의 서사와 에피소드에 관객을 몰입하게 시나리오를 구성했다. 나의 감상평이 말하듯 감독의 정치적 의도는 잘 은폐되었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의 끝을 놓치지 못하는 장치가 되었다.
하지만 건국전쟁은 파묘의 접근과는 정말 달랐다. 건국전쟁은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알리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다큐는 사실에 기반하기보다는 마치 현대적 건국신화를 쓰고 싶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개연성 있는 허구로 다가왔다.
건국신화는 국가의 창업 기원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화이다. 신화는 대체로 국가의 기원을 다룬다. 건국신화의 내용은 건국시조가 초자연적 현상을 동반해 강림하고 도읍을 정하고 나를 세운다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기본적 내용에 건국신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내용을 추가하게 된다. 신화 속 건국시조는 신령하고 권능을 가진 존재이다. 건국신화는 건국시조를 신격화하고 영웅화하기 위한 의도를 충실히 표현한다.
내가 건국전쟁을 건국신화에 비견하는 이유는 건국전쟁이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과 영웅적 면모를 부각하면서도 역사적 사실-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수많은 평가를 교묘히 비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차고 넘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일일이 다룰 필요가 없겠다. 현재 수많은 언론들과 유튜버들이 이 내용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으므로 궁금한 분들은 ‘건국전쟁’과 ‘파묘’라는 검색어로 조회해 보기 바란다.
최근 건국전쟁의 만든 김덕영 감독은 자신의 SNS에서 ‘파묘’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나섰다.
<건국전쟁> 관객이 96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 주가 가장 큰 고비가 될 것 같다. 또다시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전쟁을 덮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하고 있다 ….. 진실의 영화에는 눈을 감고, 미친 듯이 사악한 악령들이 출몰하는 영화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자들이 누구냐? 대한민국의 파국을 막을 수 있도록 모두가 고민해야 할 상황이란 생각이 든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파묘’와 ‘건국전쟁’은 각각 말하고 싶은 역사적, 정치적 의도가 있다. 그러나 세상사는 선과 악으로 그렇게 깨끗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역사가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이 잘 구분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대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철학자 칸트는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오묘한 말을 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본질을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식의 차원이나 윤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 본질 자체에 대한 설명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세상만사는 고정된 가치를 가지고 교조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하나의 관점을 관철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선도적이고 흑백논리에 치우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흑백논리와 교조적 가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인문학과 문학예술이 살아남을 수 없다. 흑백 사고는 감정적으로 선악을 심판하려 든다. 감정적인 선악관이 선명해질 때 대중은 더 크게 동요한다.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남을 따라 장에 가는 성질인 대중성(Offentlichkeit)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이는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 있다는 뜻으로, 자기의 뛰어난 지덕을 나타내지 않고 세속을 따름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빛만 좋아하여 먼지는 더럽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 빛과 먼지는 모두 함께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 생각이나 세상사를 택일적 선명성으로 가르고 이원적인 적대감으로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만사는 항상 이중적이 이서 화광동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좋은 것은 항상 좋은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의도도 과도해지고 딱딱해지면 부러지거나 아픈 폭력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인간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는 항상 훌륭한 리더를 찾아 권한을 위임하지만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수많은 리더들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무능하거나, 우왕좌왕했고, 때로 광포한 독재가 되기도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좌파나 우파 어느 한 진영의 논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노자는 복합적인 세상을 흑백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단순 소박한 가치관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가치에 대해 괴로움을 주지 않았는지를 성찰하며, 세상을 전체로 보살피려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생각이 방정하면 남을 자르게 되고, 청렴하면 남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강직하면 방자해지고, 영광스러우면 휘황찬란해진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가치를 넘어서야 한다. 각자의 진영이 추구하는 순수한 가치라는 것도 언제나 반가치라는 찌꺼기를 배설해 내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순수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썩임과 혼용을 불순하다고 여기고, 순수만 고집하여 편협성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한계 속에 존재한다. 순수한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그것은 배타적인 독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혐오감을 노출하고 반대 진영을 타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세상은 내편과 네 편으로 갈라져 싸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복합적인 것이다. 단순한 감정적 흑백 논리는 세상 전체를 이롭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감정적인 흑백 논리보다 함께 공존하기 위한 지혜를 터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누가 더 순수했느냐의 기준보다, 누가 편가르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양식으로 서로를 잘 보살피려고 노력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모두가 함께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역사를 통해 그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지만, 단 한 걸음도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딛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묘>와 <건국전쟁>을 정치적 대립으로 끌고 가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파묘가 천만 흥행을 질주하는 이유는 정치적 편향성 때문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흥행할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전쟁이 상대적으로 흥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말해서 뭐 하랴?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졸았다. 그것은 내 정치적 편향 때문이 아님을 항변하고 싶지만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나와 같은 꼭 영화관에 가 보시길 강력히 추천드린다.
만약 건국전쟁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고 감동한 분이라면 우파의 견해를 반영하는 신문이나 비슷한 논조를 가진 유튜브를 찾아보면서 자신의 탄탄한 견해를 공고히 해나가길 바란다.. 혹 건국전쟁의 내용을 반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초중고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 정도만 참고해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교과서 자체가 좌파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므로 전방위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관만이 진리이므로 한 권의 교과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는 말자.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계는 좌와 우의 균형 속에서 꽃 피우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관용이 사라지면 우리는 또다시 처절하게 피 흘리며 서로를 죽고 죽이는 엄혹한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 독재의 서슬 퍼런 총칼에 수 십, 수 백만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던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대립과 반목의 정치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지유를 더 철저히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적 의무가 머릿속에 있는 습관과 형식을 벗어나 능동적인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철인을 만날 수 있을까? 뜬금없이 구한말의 역사 논쟁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우리의 현재와 곧 다가올 미래가 너무나 걱정스럽다.
철학적 의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지능적인 습관들과 형식들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실천적 효용성의 숨은 생각을 가짐이 없이,
살아 있는 것을 검토하고,
능동적으로 세상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철학에 속하는 대상은 사유하고 보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을 마주하는 철학의 태도는
행동하기만을 겨냥하고,
무기력한 물질의 매개에 의해서만 행동할 수 있고,
오직 이런 관점에서만
현실의 나머지를 바라보려고만 하는
과학의 태도일 수는 없다.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