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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r 08. 2024

두메산골 신원 골짜기의 절규

거창 신원 학살사건을 추모하며

두메산골 신원 골짜기의 절규

: 거창 신원 학살사건을 추모하며


1. 하늘 아래 첫동네 신원


고교시절 학교에서는 격오지 마을에 있는 아이들을 매주 찾아가 주일학교를 여는 반사라는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5군데의 지역이 있었다. 그중 나는 신원반사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1994년 3월 어느 봄날 경남 거창에서도 가장 오지인 신원과 첫 인연을 맺었다. 신원은 두메산골이었다. 두메산골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시골이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를 뜻하는 말이다.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선배 중 한 명이 아침 6시 반에 나를 깨우러 왔다.


“재영아, 일어났니? 우리 7:00 첫차 탈 거야. 늦지 않게 준비해라”


비몽사몽 간에 세수를 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늦어도 아침 7시에 기숙사를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주일학교가 시작 시간이 10시인데, 신원면 소재지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모으고 주일학교를 시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3시간이라. 그때는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학교에 적응도 잘 안된 상태였다. 분명히 반사 활동 지역은 거창이라고 했는데 편도로 2시간이 걸려서 도착해야 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던 터라 버스를 타고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던 것 같다. 내가 반사를 잘 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당시 신원은 거창읍내에서 합천댐 상류의 광활한 풍경을 지나면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수십 번 넘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가서야 목적지에 소재지에 도착할 수 있다. 우리가 반사 활동을 하는 곳은 신원면에서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있는 산수국민학교(당시 폐교됨)였다.


버스로 한 시간을 왔는데 이제는 또 꽤 먼 거리를 간다는 말에 또 우리는 기다리고 있을 십 수명의 아이들이 있다는 말에 걱정과 기대의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경험 있는 2학년 선배들이 1학년들을 맡아 일대일 선생을 자처한다. 2학년 중에서도 퀸카로 소문이 자자한 선배 누나가 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해 줬다.


“얘들아, 이제 여기서부터 걸어갈 거야. 많이 걸어야 하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해. 히히~”


그렇게 터벅터벅 언덕길을 걸었다. 그날 두메산골의 해는 늦게 떠 올랐다. 걷다 보니 왼쪽으로 맑은 계곡과 층계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산골의 계곡은 정말 맑고 깨끗했지만, 아직 봄이 닿지 않은 탓인지 투명하기보다는 물이 시커멓게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안갯속에서 보이는 논과 산등성이는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장엄하면서도 흐릿한 느낌이었다. 깊은 산골 특유의 신선한 숨결은 마치 오늘 이 마을을 처음 방문한 나를 반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길가에 늘어선 밭과 둔덕 사이로 연두 빛 싹들이 움트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아이들이 사는 마을은 세 곳이다. 청룡, 오례, 내동. 아이들과 1년 이상 만나 교감이 있는 2학년 선배와 1학년 새내기가 2~3명 한 조가 되어 가가호호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한단다. 첫 번째 마을은 우리 학년 홍일점인 동기와 남자 선배가 한 조로 이동했다.


나는 두 번째 오례 마을을 맡았다. 마음속으로 한 조가 되길 바랐던 선배와 한 조가 되었다. 동네로 올라가는 동안 선배는 친절하게 아이들을 처음 대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을 차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는데 선배 덕분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메마른 돌계단을 걸어 논과 밭 사이를 지나 언덕을 올랐다. 길은 조그만 마을 창고를 지나 동네 한복판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초입에 있는 큰 감나무 아래 공터에 도착했다. 감나무는 앙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지에는 이미 물이 차 올랐다. 몇 걸음 옮기니 쑥 내음이 진동을 한다. 회색 솜털로 덮인 쑥이 군락을 이루며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기분 좋은 쑥 향기와 더불어 맑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마치 이 향기를 태워 하늘로 끌어올리기라도 하듯 그날 햇살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이제 아이들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저 멀리서 7살쯤 돼 보이는 새까만 아이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당돌하게 우리 쪽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거 오지 말라 캤잖아. 이번에 또 왔네. 뭐할라꼬 또 찾아왔노?”


어린 녀석이 만나자마자 반말부터 하며 우리를 경계했다. 선배가 친절하게 받아줬다.


“택산아 잘 지냈냐? 누나는 어딨어? 교회 가야지”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었다. 두 팔을 벌렸다.

그런데 이 녀석의 행동은 더 가관이다. 갑자기 옆에 있던 낫을 들더니 죽일 듯 선배에게 달려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지 말라 안 캤나? 우리 델꼬 가서 뭐할라꼬? 재미도 없는데”


그리고는 낫을 우리 쪽으로 획 던졌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응수했다.  


“야, 나는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러기냐? 섭섭하네~ 히힛”


이렇게 웃고는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막대사탕을 하나 꺼내서 아이에게 건넨다.


“이거 먹어봐. 엄청 맛있는 거~다”


녀석은 태도가 돌변했다. 사나운 짐승에서 순한 양으로 천천히 걸어와서 냅다 사탕을 가로채 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는 사탕 때문에 거기 가는 거는 아이다. 진짜로”



좌: 산수국민학교, 우: 옛 이발소

우리는 이렇게 매주 일요일 아침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한 시간 버스를 타고, 20~30분을 걸어 올러 와서 1시간을 이렇게 놀아주며 아이들이 마음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항상 사탕을 받아 든 택산이가 우리 우군이 되어주었다. 자기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동네 형, 누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산수초등학교 앞에 있는 옛 이발소 건물에 3개 마을의 아들 십 수명이 모인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들을 기다리며 이해해 줬다. 매주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우리가 했던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함께 노래 부르고 놀아주고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요셉 이야기, 모세가 애굽을 탈출하던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해주는 일이었다.


나는 큰일이 없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반사 활동을 했다. 보통은 3학년 때는 입시를 위해 반사 활동을 쉬는 것이 관례였지만 나는 친구 중렬이와 함께 3학년 때도 줄곧 신원을 찾았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기거 있었다. 매번 우리에게 돌을 던지고 낫을 들고 달려들지만 누구보다 관심과 애정이 고팠던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아이들과 손잡고 시골길을 걷는 동안 아이들의 표정에서 지워지지 않던 해맑은 미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폐허처럼 남은 산수국민학교의 운동장에서 옛 이발소 건물 안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노래와 의미 있는 성경 속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2.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하여


나는 이제부터 이 아이들의 조부모와 부모가 겪었던 슬픈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경남 거창의 신원은 6.25 전쟁이 발발 한지도 모를 만큼 평화로운 곳이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거창 지역까지 덮쳐왔다. 소설 태백산맥 8권에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개요와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방군 제11사단은 후방 즉 추풍령 이남의 공비섬멸이라는 분명한 작전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선의 적보다도 더 위험하고 큰 적일 수 있는 공비를 완전 섬멸해야 할 임무를 띤 그 사단의 주요 작전지역은 지리산 일대였다. 지리산을 에워싸고 있는 세 개의 도를 장악했던 인공세력은 민간지지자들을 이끌고 입산했고, 거기다가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들까지 합세하여 그들은 이삼 개월 동안에 미수복 지구를 기반으로 국군 및 연합군에 다시 대항할 수 있는 전열을 정비했다.


그런 상황 아래서 중공역군(逆軍)의 불법침략은 그 잔비들의 만행을 촉진시키는, 기름을 붓고 불을 당기는[加油點火]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국방군에서 내리고 있는 상황파악이었다. 그러므로 전 사단병력이 총동원되어 견벽청야의 작전을 전개하여 공비를 완전섬멸 한다는 기본작전이 정해졌다. 견벽청야는 국민당군이 홍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쓴 작전 중의 하나로, 아군 쪽은 벽을 치듯 견고하게 지키는 한편 적의 활동지역에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초토화작전이었다. <중략>


양효석의 직속상관인 3 대대장이 연대 작전지휘관회의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었다. “제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적을 공격하고, 제2대대는 진주에서 산청으로 적을 공격할 것이며, 제3대대는 아직 미수복지구로 남아 있는 거창군 신원면에서 준동하고 있는 400 내지 500으로 추산되는 공비들을 완전소탕하고 산청으로 공격할 것. 세부적인 작전지시는 연대작전명령부록을 참조할 것이며, 각급지휘관들은 그 지시를 착오 없이 수행토록 하시오.”


  연대장이 내린 작전명령이었다.


  연대작전명령부록의 지시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작전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


  “대대장병 여러분, 다들 똑똑히 듣기 바란다. 우리 대대는 공비소탕을 위해 출동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수복지구로 남아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는 거창군 신원면을 수복시켜야 한다. 그곳은 지난 10월 초순에 수복되어 경찰에 치안책임을 맡겼는데, 두 달 만인 지난 12월 5일에 공비들에게 다시 뺏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공비들은 괴뢰군 제4사단인 방호산사단의 일부 패잔병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 패잔공비들이 벌써 두 달 동안이나 신원면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우리 국군의 명예를 위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들을 이 잡듯 완전소탕해 버리고 태극기가 펄럭이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일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병 여러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지난 1월 중순경부터 재반격을 시작하여 현재 수원까지 재탈환했다. 이제 서울의 재탈환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최전선에서 이렇게 용맹스럽게 적을 무찌르고 있는 이때에 후방에서는 용기백배하여 공비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공비들은 제놈들의 주력이 다시 패주하면서 전선이 제놈들한테서 멀어지게 되자 사기가 다시 떨어졌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공비들을 완전소탕해야 한다.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중략>


군인들이 경계하는 속에서 줄이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의 대열이 교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압수한 피난짐에 손을 못 대게 하고 줄을 세울 때 벌써 어른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맨손으로 운동장을 떠나게 되자 실오라기같이 가늘게 남았던 피난길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끊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이 어떤 길인가를 분명히 확인시킨 것은 사람들이 교문을 나서면서부터였다. 군인에 경찰과 방위대가 포함된 토벌대들이 길 양쪽에 늘어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사람들이 걸어갈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벌대원들이 만들고 있는 줄은 박산골로 이어져 있었다. 나이 든 남자들, 부녀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태반인 신원면민 500여 명은 그 두 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박산골로 빨려들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한꺼번에 갈겨대는 수많은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총소리들은 신원면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산들과 그 골짜기 골짜기에 부딪쳐 겹겹의 메아리로 울려가고 있었다. 그 요란하게 튀는 총소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한쪽에 빙글빙글 맴돌이질 치는 검은 무늬를 새기는 것이 있었다. 그건 수백 마리가 무리진 까마귀떼였다. 까마귀떼가 유유하게 선회하며 차츰차츰 그 높이를 낮추고 있는 곳은 어젯밤에 학살이 자행된 탄량골의 하늘이었다.

<태백산맥, 조정래, 해냄>



https://youtu.be/OR9-LIZHyXk?si=Okv_ja4t4PBGzSUY​​

<청야: 거창학살사건을 주제로 만든 영화>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미군을 추축으로 한 연합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전쟁을 반전시킨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병력 중 다수가 퇴로가 차단 당했다. 그 중 일부가 지리산 일대를 거점으로 게릴라(빨치산) 활동에 들어갔다.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창군 신원면은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1개월이 지나서야 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거창경찰서는 1950년 9월 27일 수복되었지만 신원지서는 11월 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해 정부가 1•4후퇴를 한 후 국군과 유엔군의 전면적 반격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창군 신원면 일대는 국군과 경찰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할 무렵이었다.


https://youtu.be/DdpMgWzezQk?si=7_jQNsHfK7F_w6T2

<다큐 우문현답: 거창 학살 사건 생존자 인터뷰 영상>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


제11사단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인데, 이는 최덕신(崔德新) 사단장이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견벽청야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청야전술 이었다. 그러나 케케묵은 수천 년 전의 병법서 내용을 현대전에서 구체화시키는 순간 무참한 학살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독립영웅 최덕신은 1950년-1951년 동계 작전 중 11월 남원군에서 벌인 학살극을 시작으로 12월 함평군, 1월 광산군 등 영호남에 걸쳐 벌인 잔혹한 학살극을 견벽청야라는 중국의 시대착오적이고 야만적인 병법에 맞추어 차근차근 진행했다.


제9연대장 오익경(吳益慶)으로부터 사단의 작전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은 1951년 2월 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로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 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숨 막힐 듯이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한 총 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 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산청군 금서면 생존자 최금자씨 증언>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성별: 남자 327명, 여자 392명)으로 총 719명이었다(이는 현재까지 공식 확인된 희생자의 숫자이다. 추정 사망자는 최대 14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https://youtu.be/pUuP5JKdtq0?si=L-io0o5zc82FzQR4​​

<드라마 야인시대: 거창학살 사건을 소재로 사용했음>


이 사건에 대해 부산 피난 국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다. 국회는 신중목 의원의 보고 이후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방부, 내무부, 법무장관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해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국내 제반 사항에 대해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는 서한만을 보냈다. 다음날 제55차 본회의에 출석한 장면(張勉) 총리와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 김준연(金俊淵) 법무장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거창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각각 엇갈린 보고를 했다.


한편 거창사건이 국회에 알려지기 전인 2월 26일 신성모 국방장관은 헌병사령관과 경남경찰국장 등을 이끌고 비공식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와 별도로 내무부는 장영복(張永福) 경무관이, 법무부는 김준연 장관의 지시로 부장급 검사 2명이 각각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3부의 조사내용은 모두 달랐다. 국회는 각 부의 보고가 다르고 사안이 중요한 만큼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의안을 채택했고, 1951년 3월 30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와 내무•법무•국방부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4월 1일 오후 3시 조사단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이 내무부 차관실에서 위원회 조사단 활동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한 후 4월 3일 신원면 사건현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기 전 조사단은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계곡에 공비를 가장한 군인들의 총격으로 거창경찰서로 되돌아왔다.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은 매복한 9연대 수색중대 40여 명의 병사들에게 공비로 가장해 국회조사단이 올라오면 사격은 하되 사람이 맞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조사단은 거창경찰서에서 행정부 조사관과 국회조사관이 선정한 한동석 대대장을 비롯한 거창경찰서장과 형사, 신원면장, 그리고 신원면 현지 주민 등 모두 12명에 대한 증언조사를 벌였으나 김종원 대령의 방해로 사건의 실체는 밝히지 못하였다.


이승만 정부와 국방부는 조사단에 대한 위장공비 사건으로 국회의 압력에 직면해 4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국방, 법무, 내무장관을 사직하도록 했다. 국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이승만은 결국 신성모의 사표를 수리하였고, 5월 7일 이기붕(李起鵬)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국방장관이 이기붕으로 바뀐 뒤 헌병사령부는 5월 하순경부터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했다. 대대장 한동석은 5월 28일 구속되었고, 이어서 오익경과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의 조사결과가 보고되어 수사가 계속되었다.


군 검찰은 오익경과 한동석, 3대대 정보장교 이종대(李鍾大)를 기소했고, 제1차 군법회의가 1951년 7월 28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개정하였다. 김종원은 군법회의가 진행 중이던 9월에 국회조사단 피습사건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수사와 기소를 거쳐 군법회의가 열렸고 심리 끝에 12월 16일 선고 공판을 열었다. 강영훈(姜英勳) 재판장은 김종원 피고의 문서위조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징역 7년 구형)을 선고했다. 9연대장 오익경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무기(사형구형)를 선고받았다. 3대대장 한동석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년(사형구형)을, 이종대는 무죄(징역 10년 구형)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을 1년도 되지 않은 다음 해 모두 특별 사면했고 특히 김종원은 경찰의 간부로 다시 등용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1960년 4대 국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형식적인 피해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


3. 새들은 울고 있다


나는 신원이 두메산골이라 사람이 적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늘 휑하던 마을은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났던 아이들의 대부분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경계하기도 했지만 내심은 우리의 방문을 참 좋아했었다. 이제 와서 그것도 이제 이해가 된다. 내가 신원반사 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의 조부모들과 친지들이 다 그때 돌아가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맑은 눈의 아이들 이 생각나서 너무 슬퍼진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논쟁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한쪽은 건국전쟁을 벌이고 다른 한쪽은 친일 잔재의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이념은 무게가 없다. 인간은 무게도 없는 이념 때문에 총칼로 서로를 죽고 죽인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생각을 가지고 종족으로 죽이는 일을 벌이지 않는다. 오직 이성을 지녔다는 인간만이 총과 칼로 서로의 목을 겨눌 뿐이다. 당시 신원 사람들은 빨치신과 토벌대 사이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원 학살 사건은 깃털보다 가벼운 이념 때문에 천하보다 무거운 사람의 목숨을 가차 없이 빼앗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념 전쟁을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공기보다 더 가벼운 이념을 지키고 위해 또다시 피를 흘릴 것인가? 나의 형제가, 부모가, 친지가 죽어나간다 해도 그 핏빛 이념을 찬양할 것인가? 이념과 아무런 싱관 없이 평화롭게 살아온 두메산골 신원 사람들의 원혼은 누가 위로할 것인가?


나는 어제 숲이라는 시를 쓰면서 문득 새들의 노랫소리를  왜 웃지 않고 운다고 표현하는지 궁금했었다. 그 예쁘고 가냘픈 새들은 진짜로 울고 있었다. 총탄에 죽어간 불쌍한 어미와 아기들, 그리고 백발의 노인과 아지메들을 보며 울었던 것이다. 나는 어제까지 그 울음소리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들어보니 너무 가냘픈 떨림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다.


https://youtu.be/xr6Dxc4Eprc?si=f-a6xSflscWSw8S3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새들의 울음>


새들은 웃지 못해

산야의 통곡을 전했다.


따뜻한 가슴으로

먼저 죽어간 넋들을 위로하며

매일 그렇게 울었다.


나 같은 무정한 인간에게

그들의 슬픈 사연을 전해주며

새들은 멍 울음을 퍼트렸다.


아~ 산하여~

핏빛 절규여~

신원 골짝에 깃든 잠 못드는 정령이여.

잠들지 못하는 핏빛 울음이여.....




<참고문헌>

거창의 역사, 신용균,

거창을 말한다, 한인섭, 경인문화사

거창양민학살사건자료집, 한인섭,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태백산맥, 조정래,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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