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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r 15. 2024

달리지 않는 사람, 달리고 싶은 사람

봄예술제 2부: 부끄러운 마라톤

달리지 않는 사람, 달리고 싶은 사람


프롤로그


https://podbbang.page.link/eYpLdtadm47KnLi19


1984를 읽고, 파묘를 보고, 건국전쟁을 보고, 팟캐스트를 준비하면서 정말 울며 지낸 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저의 무지함을 탓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좌우를 떠나 먼저 죽어간 호국영령들과 수 많은 백성들의 넋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에 대해 저 같이 무식하고 무정한 인간이 왜 이런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봅니다. 역사상 그토록 많은 평범한 백성들의 죽음과 수 많은 의인의 죽음들이 그저 헛되이 잊혀지지 않게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무엇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인 내 친구, 시지포스에게 이 팟캐스트를 바칩니다.


1.   예선 탈락의 수모


나는 고교 시절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공부도 그랬고 운동도 그냥 평균 정도 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봄이 되면 3일 동안 체육대회, 백일장, 꽃꽂이, 사과 길게 깎기 등 종합 예술에 가까운 봄 예술제(이하 봄예로 통일)를 개최했었다.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4월 한 달은 봄예로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요즘은 학 학년이 100명이 안되지만 그 당시는 한 학년이 약 200명이었으니까, 전교생이 약 600명 정도였다. 특히 축구, 농구, 배구는 1인 1 종목 참여가 원칙이었으므로 전교생은 의무적으로 구기 종목에 참여해야 했다. 내가 군대에서 농구, 배구에 자신 있었던 것은 바로 봄예에서 갈고닦은 실력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학창 시절에는 봄예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둬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3학년 때 농구를 했는데, 예선에서 1학년 팀과 맞붙어 예선탈락 했다. 한창 성장하던 시기이기에 1학년과 3학년은 체격, 체력에서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학년 팀이 1학년에게 진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고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부끄러운 일은 따로 있다.


2.   마라톤: 봄예술제의 하이라이트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봄예의 하이라이트는 전교생이 참여하는 마라톤이었다. 마라톤은 올림픽에서처럼 모든 종목이 마무리된 이후에 전교생이 참여하는 종목이다. 나는 1학년 때 마라톤에 참여한 이후 단 한 번도 마라톤 경기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힘들게 뛰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느라 체력이 소진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마라톤은 그냥 피하고 싶은 종목이었다. 1학년 때 멋모르고 참가했을 때도 뛰기는커녕 그냥 산책하듯 걸어 다녔다. 해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마라톤에 진심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평소 걸음걸이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녀석을 보고 친구들은 놀려대기 바빴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은 그 친구만 운동장을 네 바퀴씩 뛰도록 시켰다. 당시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졸업을 한 이후 그가 태어났을 때 소아마비가 있어 하반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 3년 내내 반사생활을 하며 붙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의 집안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평소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다.


3학년 봄예 때 나는 농구에 예선 탈락한 게 너무 속이 상해서 그 이후 행사에 미온적으로 참여했다. 다른 종목 응원에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피하고 싶었던 마라톤은 말해 무엇하겠나? 학생회 임원에게 아파서 못 뛴다고 이야기하고 운영팀에 참여했다. 운영팀은 마라톤 중간중간에 이동 배치되어서 물도 나눠주고 현장 교통 통제도 돕는 일을 했다.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출발선에 전교생들이 모였고 출발을 알리는 소리에 모두 뛰어 나갔다. 마라톤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달리기에 자신 있는 친구들은 스스로와 반의 명예를 위해 전력 질주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마치 세렝게티 초원에 있는 얼룩말을 보는 것 같다. 분명 우리와 같은 평범한 고등학생들인데 그들은 언제 어디서 그런 신체 조건과 지구력을 키웠는지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 참가한 학생들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산보를 즐기고 있었다.


3.   형벌을 견디는 인간


그 가운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학생이 있었다. 후미 그룹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몸이 불편하다는 내 절친이었다. 나는 차로 이동하면서 그를 응원했다.


“언제든 힘들면 얘기해.
내가 바로 앰뷸런스 불러줄게”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도 없이 달리기에 집중했다. 당시 나는 교통 통제를 위해 진행팀 선생님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으므로 그 친구가 달리는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술에 취한 사람이 뛰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그의 달리기는 평범한 학생의 산보보다 더 느렸다. 마치 거북이가 토끼를 따라 잡기라도 하듯 그는 느리지만 최선을 다해 뛰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얼굴은 빨갛게 변하다 못해 까매졌다.


그는 마치 신들에게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듯 언덕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달리다 안되면 기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가 무익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그 경기에서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신이 자신에게 내린 형벌에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결기에 차 보였다. 세상이 왔다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하반신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뛰었다. 나는 그가 뛰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경련하는 얼굴, 뺨 위로 흐르는 빰, 육중한 몸을 지탱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꽉 움켜쥐고 있는 손…. 내 눈에 비친 그는 신과 같았다. 그는 달리는 동안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는 그냥 달리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엇인가를 해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죽전 언덕을 향하고 있을 때는 전교생이 모두 결승점에 도착한 이후였다. 이제 그만 남았다. 그리고 전교생은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나도 곁에서 이렇게 외쳤다.


“이제 마지막이야!
이제 이 언덕만 지나면 결승점이라고”


나는 한 인간이 어떤 일을 이렇게 진심으로 하는 것을 처음 봤다. 그는 끝나지 않는 고통에 맞서 싸우는 전사와 같았다.  걸음걸음의 의미와 무게가 전해졌다. 비록 호흡은 턱까지 차고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나는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그의 얼굴에서 약간의 미소를 발견했다. 그는 드디어 결승점에 골인했다. 그는 자기가 결승점을 통과한다고 해도 그의 비극이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틀거리는 육신은 그가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완치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반항했지만 자기 육체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겠다는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날 나와 학우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봄예에서 진정한 승자는 진호였다고. 그는 그 모든 괴로움으로 이겨내고 그만의 승리를 완성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운영팀으로 참가한 마라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1학년 팀에게 져서 예선 탈락했다고 부끄러워했던 내 모습이 더더욱 초라해 보였다. 나는 경기에 졌기 대문에 초라했던 것이 아니라 그 쪽팔림에게 나의 자존심을 내어 준 패배자였기에 더 비참했었다. 인간에게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승리가 연약한 그의 육신과 그가 이겨내야만 했던 무수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나의 패배는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것의 소중함을 몰랐던 나의 무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같은 땅에서 나온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까뮈의 유명한 말처럼 그림자 없는 태양은 없으며, 밤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아는 불행한 한 인간은 불합리한 세상에 늘 대안을 이야기했으며, 그것을 극복하지 위한 그의 노력은 끝난 적이 없다.


4.   절교를 당하다


각자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때는 핸드폰도 SNS도 아직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지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생활 할 즈음 녀석에게 이메일이 왔다. 서울로 왔으니 얼굴 한번 보자고. 그는 지방에서 법을 전공하고 서울대 법대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고 했다. 법제사(법과 제도의 역사)가 전공이라며 대한민국에서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학자는 자기밖에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방 끈 짧은 나는 그 당시 그가 하는 말 대부분 이해도 못했을뿐더러 그냥 친한 친구에게 하는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 있던 해였다. 그는 갑자기 서울에서의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지리산에 있는 함양의 모 문학관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친구라 낙향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모른다. 내 추측에 자신의 지도교수와 논문 저자 등재와 관련해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SNS를 안 하던 그가 매일 쪽 글을 올리던 게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깊은 슬픔 속에 술에 의지하여 폐인처럼 지내던 그에게 내가 이제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냈다. 그날로 그는 나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절교를 선언했다. 그즈음 그가 쓴 글이 있다.



아이들의 눈물 같다. 지난밤부터 하루 종일, 이미 어두워진 지금까지 비가 내린다. 그저 무수히 반복되어 있어 왔던 기상현상 하나가 이렇게나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저 망해야 할 세상이라며 슬프기 그지없는 안으로만 침잠하다가도 부조리한 현실에 다시 관심을 가지고 세세한 사실들을 쫓게 되는 심리적 널뛰기가 반복된다. 이런 개차반의 현실을 만든 이들이 있고 마땅히 책임져야 할 공적 지위와 직위를 맡은 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단원고 2학년 한 반이 전체가 실종되거나 하나 둘 혹은 몇이 구조된 반이 있다고 한다. 텅 빈 교실의 책상마다 국화 다발이 놓인 사진을 보았다. 참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드나…. 슬프고 죄스럽기 그지없다. 누군가 감정의 위험을 말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그 죄를 묻기 위해서라도 더욱 슬퍼해야 한다. 나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배웠다. 나를 가르친 목사님들은 인간은 죄인이라 하셨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무수한 양민들이 당했던 약사와 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이 살해당한 것처럼.


또다시 불의한 권력은 이익을 위해 타인을 죽일 것이다. 이길 수 없을지라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아이들처럼 나와 유리가 죽어갈지라도, 저들이 계속 부조리하게 권력을 유지하게 될지라도 그런 현실이 반복될지라도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그들에게 눈을 부라려야 한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하는지 해왔는지 똑똑히 알고 있는 내가 아직은 살아있다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그들과 직면할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내었던 시대를 그렇게 용서하지 못할 시대로 기억할 것이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죽은 아이에게 용서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용서하지 마라고 하고 싶다.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 용서받을 자격도 용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 공동체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자격도 없다. 역사상 그토록 많은 불의를 어느 것 하나 개선하지 못하고 무수한 양민의 죽음을 수많은 의인의 억울한 죽음을 그저 시간의 거적으로 덮어왔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은 이렇게 처절하게 서로가 서로를 직면하여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죄스럽게 죽도록 싸우다 마쳐야 한다. 진지하고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면 그래야 한다. 눈을 부라리며 지금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죄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싸우고 그 죄형을 받는 순간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죄스러운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죽는 순간까지 살아갈 것이다. 미안하다. 용서하지 마라(2014년 4월 11일)



이렇게 몇 년을 하루 같이 슬퍼하다가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지리산 자락 어딘가에 있던 그의 숙소의 차디찬 화장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고교 시절부터 절친이라며 함께 다녔던 나는 사실 아직까지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0년이 넘도록 서울대에서 석 박사 과정을 이수한 그가 남긴 논문 한쪽 읽어보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내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지켜봤던 자로서 그가 얼마나 삶에 진심이었는지 자신의 불행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정면으로 맞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와 밤을 지새우며 나누 던 얘기들이 몇 날 며칠이고 또 울며불며 하소연하던 일이 또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자기가 아는 지인들의 경사와 조사에는 단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경상도에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진보 후보를 추대하던 그였다. 그는 교회 공동체만이라도 당당히 나와 이웃의 고통에 대한 최종적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던 사람이었다. 공부에 누구보다 천재적 재능을 지녔지만  선천적 장애로 운동 신경이 손상되어 평생 악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법고시를 못 보고 대학원 공부를 선택했다. 내 아들에게는 꼭 자필로 천자문을 엮어 선물해 주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던 선량하기 그지없던 친구였다.  


나는 그로 인해  부끄럽다. 3학년  예술제에 마라톤을 뛰는 것을 회피하고 비겁하게 운영팀을 했던 일로 인해, 세월호 사건 이후 밤잠을 설치며 슬퍼하던 그에게 적당히 하라며 훈계하던 일로 인해,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나는 부끄럽고 화가 난다.


그가 찾아갔던 경조사의 수백, 아니 수천의 지인들에게 찾아가 일일이 얘기해 주고 싶다. 밀양 어느 수목원에 외로이 안치된 그의 영정 앞에  번만 가서 그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하늘 앞에 평생을 부끄러워하며 울었던 그의 불행한 삶을 추억하고  번만 위로해 달라고. 그리고 나도   말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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