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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40분, 야탑역에서

삶의 전장을 뒤로하고

by 아레테 클래식

5시 40분, 야탑역에서


시골에서 자란 나는 서울의 아침이 매일이 전쟁처럼 느껴졌다. 특히 분당선. 그 노란색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지하철은,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이자 생존의 전장이었다.


5시 40분.


야탑역 플랫폼 끝에서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섰다. 그 시간대는 첫차가 출발하던 시간이었다. 회사까지 1시간 40분! 7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그 이상한 회사를 나는 15년이나 참고 다녔다.


전철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역들을 지날 때마다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서로의 어깨를 미는 방식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나는 몇 년에 걸쳐 터득한 무언의 기술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세한 틈을 읽고, 가방을 앞으로 안은 채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눈빛을 마주치면 안 된다. 괜히 민망해지고,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 서로는 투명인간이었다. 단지 기계처럼 목적지까지 이송되는 물체처럼.


선릉역쯤 가면 몸의 방향은 이미 뒤틀려 있었다. 가방은 다리 사이에 처박혀 있었고, 등줄기엔 땀이 흘렀다. 누군가의 뒤통수가 이마에 닿고, 누군가의 머리카락은 얼굴에 스쳤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것조차 사치였다. 가끔은 누군가의 이어폰 소리가 크게 울렸고, 가끔은 누군가의 한숨이 나를 덮쳤다. 모두가 피곤했고, 모두가 인내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 살아 있다는 건, 감각을 줄이고 표정을 비우는 것이었다.


환승역인 왕십리.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어디로 가야 더 빨리, 덜 부딪히고, 덜 답답하게 갈 수 있을지. 나는 그 흐름에 섞여, 또 다른 노선을 탔다. 다시 군중, 다시 휩쓸려 가야 한다.


나는 이 삶을 어떻게 15년이나 버티며 살아왔을까?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돌아오는 생활. 하루 네 시간이 통째로 ‘이동’에 소모되었다. 그 네 시간은 결코 공백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치이고, 불쾌함을 견디고, 온몸이 긴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 하지? 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이게 정말 정답인가?


사무실의 책상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모든 것은 일사불란했다. 엑셀 파일도 결재선도, 회의도, 복사기 소리도. 하지만 나는 점점 무기력해졌고, 나라는 존재는 의미를 잃어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야탑역 플랫폼에서 다시금 밀려들어오는 인파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쯤 내 삶을 살게 될까?’


그 질문은 천천히 나를 움직였다. 나이 마흔 퇴사를 꿈꾸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에 나는 결심했다. 두려웠지만, 결정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작은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사람과 엇갈리는 인생이 아니라, 내 리듬을 회복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퇴사 후 5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를 겪었고 많은 시행착오 끝에 다다른 외딴섬 같은 지금 이곳, 이제 나는 전철 대신 나의 앞마당으로 출근한다. 이제는 많은 인파를 뒤로하고 오롯이 나를 대면하는 곳에서 내가 선택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이 움직이고, 누가 바라보지 않아도 마음이 움직인다.


사람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더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사이에 나를 채운다. 무엇보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 깊은숨. 조급하지 않은 숨. 그것이 내 삶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창밖으로 햇살이 비칠 때, 나는 그 빛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지하철 안에서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 이제는 그 온기를 내 안에 받아들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분당선의 야탑역 플랫폼. 15년 동안 나를 날랐던 그 공간은, 지금도 여전히 바쁘게 흘러갈 것이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나처럼 삶의 고단한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그곳을 벗어나

나만의 발걸음을 디디고 있다.

야탑(野塔), 들판에 우뚝선 탑처럼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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