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가치와 이익을 넘어
어제 유시민 작가가 매불쇼에 출연해 A(가치)와 B(이익)을 추구하는 그룹으로 나눠 기존 지지층을 A로, 최근 이재명을 지지하는 새로운 지지층을 B로 구분하는 설명을 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그가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 이것이 뇌의 작동 방식이야. 우리가 보통 성인이라고 추앙하는 분들은 뇌가 본업을 내팽개치고 부업에만 몰두한 사람이야. 본업에 세게 기울어진 시람은 보수가 될 확률이 높고 부업에 많이 가중치를 두는 뇌는 진보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요. “ 출처:유시민, 매불쇼
이번 그의 설명은 과거에 그가 수구 보수세력을 구분했던 범주의 자리에 뉴이재명이라는 그룹을 치환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은 방식이어서 왠지 씁쓸했다. 그 전에는 아주 쉽게 넘겼으나 이번에는 그의 말에 나는 내 두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뉴이재명은 정말 이익에 충실한 유사 보수 유권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갈등 구조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이 비유는, 때로는 복잡한 정치 현실에 피로를 느끼는 대중에게 일종의 ‘이해의 지름길’을 제공한다. 우리는 흔히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설명해 주는 말에 안도감을 느낀다. 설명이 간결할수록, 세계는 덜 위협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경계해야 할 문제가 시작된다. 이 비유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인간 사회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이와 모순, 그리고 유동성을 지워버리게 된다. 설명은 쉬워지지만, 현실은 왜곡된다. 정치가 이와 같은 단순화의 언어에 기대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축소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장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정치는 언제나 단순해지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특히 대중과 직접 만나는 정치일수록, 복잡한 현실을 압축된 메시지로 전달해야 하는 압박 속에 놓인다. 그 결과 정치적 담론은 점점 더 선명한 구도를 요구받는다. ‘찬성인가 반대인가’, ‘우리인가 그들인가’와 같은 질문은 사고를 빠르게 정리해 주지만, 동시에 사유의 폭을 급격히 줄인다. 이러한 구도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의 문제다.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 이항대립은 세계를 이해하는 동시에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그 고정은 언제나 무언가를 배제한다. 정치에서 이 배제는 더욱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정치가 다루는 대상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계속해서 단순한 구도를 반복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기 쉬운 정치’에 익숙해지고, ‘생각해야 하는 정치’를 회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의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동일성의 폭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강압이나 억압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와 설명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작동한다. 우리는 상대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고, 그 집단의 특성을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복잡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순한 표지뿐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자영업자일 수 있고, 특정 이념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A와 B라는 구도 속에서는 이러한 다층적 정체성이 허용되지 않는다. 개인은 하나의 이름으로 호출되고, 그 이름에 맞는 방식으로만 해석된다. 이때 이해는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아진다. 우리는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정해진 틀 속에 배치했을 뿐이다. 이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폭력이다.
현실 정치에서 이러한 구조는 더욱 강화된다. 정치인은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명확한 메시지를 필요로 하고, 그 메시지는 종종 집단적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국민’, ‘서민’, ‘중산층’, ‘청년’과 같은 이름들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은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개인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치적 논의는 점점 더 추상화되고, 구체적인 삶의 조건은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정책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간의 대립을 재확인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언어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감정은 점점 더 격렬해진다. 결국 정치의 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동일성의 폭력은 이렇게 제도와 담론 속에서 구조적으로 재생산된다.
이 지점에서 ‘뉴이재명’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하나의 징후로 읽힐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을 둘러싼 이 신조어는 변화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기존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한 진영 논리에 머무르지 않는 정치를 원한다. 실행력과 결과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특정 집단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즉, 강한 리더십과 통합적 정치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가 또 다른 동일성의 틀로 굳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뉴이재명’이 하나의 상징으로 고정되고, 그것이 새로운 ‘편’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정치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이름이 바뀌었을 뿐, 사고방식은 그대로 남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가이다.
이제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좌우의 대립을 없애자는 공허한 구호를 넘어 대립 자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대적 부름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해체적 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해체는 기존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정치에서의 해체는 진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 절대적인 것처럼 작동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다. 이 태도는 정치적 언어를 변화시킨다. 더 이상 ‘누가 적인가’를 묻지 않고,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더 이상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하지 않고, ‘어떤 조건이 개선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이러한 변화는 느리고 복잡하지만, 바로 그 느림과 복잡성이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만든다.
최근 정부의 개혁 방향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민생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삶의 조건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경제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지역, 산업 구조, 노동 형태가 얽힌 복합적인 문제다. 이러한 현실을 이념의 경쟁으로만 다루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통합적 정치란 모든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연결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승리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조율하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더 강한 정치’가 아니라, ‘더 깊은 정치’다. 단순한 구호와 명확한 적대 위에 세워진 정치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반대로 복잡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견디는 정치는 느리지만 지속 가능하다. 동일성의 폭력을 넘어선다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더 복잡하게 이해하려는 태도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 위에서만, 이데올로기의 경쟁을 넘어 민생과 국민의 삶을 중심에 둔 정치가 가능해진다.
해체적 민주주의란 결국 이런 것이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삶들이 함께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정치. 이런 의미에서 뉴이재명이라는 현상을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나 갈라 치기 정도로 폄훼해서는 안된다. 새로이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복잡 다양하다. 어떤 파벌이나, 지역, 계층으로 묶겠다는 시도는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정치가 답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누구와 경쟁하고 구분해서 승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공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