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생일 선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어제 가족과 함께 성수동을 거닐며 보낸 하루가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사춘기의 문턱에 선 아이들이 무슨 선물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녀석들은 얇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너무 비싼 건 못사주지만 그래도 너무 저렴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단다. 아직은 서툴고 투박하지만 다정한 마음으로 아비를 챙겨주는 그 순간만큼 값진 선물이 또 있을까. 큰아이는 몇 번이고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묻는다.
지나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문구 편집샵에 들렀다. 그리고는 마음에 꼭드는 샤프와 연필 하나씩 골라 담았다. 큰 아이는 연신 더 좋은 선물을 바라는 듯했지만, 나무로 만든 샤프와 연필, 그 소박한 선물 속에 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성수동의 유명한 맛집들을 기웃거리다 저녁 무렵이 되자 우리는 한강시민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아직 여름 끝자락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자전거를 함께 타며 바람을 가르다 보니, 순간순간이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에 새겨졌다. 마무리는 역시 한강의 라면이었다. 흔하디 흔한 라면이지만, 가족과 함께 잔디밭에 둘러앉아 웃으며 나눈 한 그릇은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따뜻했다.
돌아와 선물을 다시 들여다본다. 손에 쥔 나무 샤프와 연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나는 늘 문방구에 진심인 사람이다. 누군가는 ‘진짜 실력자는 연장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진정 좋은 선수라면 자신을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도구를 알아보고, 그것을 통해 더 빛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내게 연필과 펜, 자와 노트는 단순한 학용품이 아니다. 그것은 책을 읽고 사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나를 무장시키는 신들의 무구(武具)와도 같다. 트로이 전쟁에 나선 영웅들이 들었던 창과 방패처럼, 나에게는 글과 사유의 전장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도구들이다.
좋은 책을 펼칠 때,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허투루 읽지 않기 위해 바른 자세를 갖추고, 내 무구들을 곁에 두고, 천천히 한 줄 한 줄을 곱씹는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전장으로 나서는 전사가 된다. 싸움의 상대는 세상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기도 하다. 그렇게 매번 책 앞에 앉는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난다. 올해의 생일은 내게 또 하나의 다짐을 남겼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내가 사랑하는 도구들과 함께, 나는 다시 한번 사유의 전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전장은, 패배가 없는 전장이다. 매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고, 매번 읽을 때마다 조금은 다른 나로 살아가게 해주는, 가장 은혜로운 전장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우리 그림자를 길게 늘여주었고, 그 안에서 나는 오래 잊고 있던 따뜻함을 느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사춘기의 문턱에서 자주 날 선 말들을 주고받기도 했고,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는 듯 멀어져 가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때의 나는 부모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흔들렸고, 아이 역시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근심이 쌓였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나는 귀한 화초를 키우듯 아이들을 대하려 애썼다. 화초가 물과 햇빛을 필요로 하듯, 아이들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함께 있어 주려 했다.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뛰고 놀고, 사소한 일상들을 나누며 천천히 시간을 쌓았다. 어쩌면 거창한 가르침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간 속에서 아이와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다.
어제 팔짱을 낀 채 한강의 밤바람을 함께 맞으며 걸을 때, 나는 깨달았다. 선물이란 꼭 손에 쥘 수 있는 물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무 샤프와 연필이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면, 딸아이와 회복된 관계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살아 있는 선물이었다. 이 선물은 오랜 기다림과 정성 끝에 찾아온 귀한 결실이자, 앞으로도 더 가꾸어야 할 소중한 인연의 증거다.
올해의 생일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가족과 함께한 즐거움, 아이들의 다정한 마음, 좋은 문방구라는 작은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딸아이와 다시 가까워진 이 순간까지. 나는 이미 더 바랄 것이 없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이 선물은, 내 삶이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