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바다를 모험하는 오뒷세우스
<첫째 아이가 그려준 낙타, 사자, 어린이, all rights reserved by SH Ryu>
1. 신비한 나라의 앨리스
옷장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온다. 멀리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 빛이 또 여러 소리들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어릴 적 읽었던 여러 이야기들은 이런 신비한 문을 통해 시작되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 나는 옷장에 들어가 온종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컴컴한 옷장 속이 무섭기도 했지만, 어쩌면 저 어둠 속에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그 미지의 세계를 기다렸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깊은 잠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서 온 가족이 감쪽같이 가라진 어린 나를 찾느라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어머니께 크게 혼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는 종종 옷장이나 장롱 안, 다락방에서 신비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꿈을 키웠다. 신비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모험이 시작된다는 스토리는 어른이 된 지금은 더 이상 흥미로운 소재일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열리고 닫히는 여러 공간들을 경험한다. 거실, 주방, 서재 무수한 일들이 펼쳐지는 여러 방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저마다의 세상을 상상하고 살아간다.
2. 오뒷세이아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식지 않았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글로벌 소싱을 담당하는 패션 MD(머천다이저)로 넓은 세상에 나갈 기회를 얻었다. 첫 출장지였던 중국 청도를 시작으로 중국 대부분 1선 도시들에 거래처들이 있었고, 중국 본토 사람들도 가보지 못했을 대륙 방방 곡곡을 발로 뛰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00년대 초반은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세상의 모든 상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대략 8년 정도 중국 비즈니스를 경험하며 권태를 경험한다. 그래서 새로운 직무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커피헌터’이다.
왜 하필 ‘커피헌터’였을까? 기존 직장을 다니면서 커피 로스팅, 바리스타, 커피 감별사 등의 자격을 준비했다. 커피 비즈니스를 하는 직무는 매우 다양하다. 커피 로스터, 바리스타, 커피 감별사, 커피 생산자, 트레이더, 바이어! 그중 내가 하고 싶었고, 할 수 있겠다 생각한 일은 커피 생두 수입업이었다. 업계에서는 좋은 커피 생두를 찾는 직무를 ‘커피헌터’라고 부른다. 커피 생산자와 커피 소비자가 만나는 접점에 있는 사람이 커피헌터이다.
커피헌터가 맛있는 커피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직무라 생각했다. 커피의 품질은 생두 단계에서 거의 완성된다. 좋은 생두 좋은 맛을 내고, 나쁜 생두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쁘다. 나는 내 직업을 커피헌터로 명명하면서 세계지도를 펼치고 북위 30도, 남위 30도 이내의 커피 산지에 빨간색 스티커를 꼼꼼히 붙였다. 나만의 세계지도를 완성했던 것이다. 지도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커피헌터가 될 일만 남았다. 그날 내가 왜 커피헌터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소서를 완성한 후 곧바로 외식사업부 본부장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곧바로 직무 전환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나의 발길을 옮겼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일 년의 절반은 해외 출장을 다녔던 것 같다. 적도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신비한 커피벨트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뒷세우스처럼 전 세계를 누비는 꿈같은 직업을 갖게 된다. 마치 오뒷세우스라도 된 듯 더 넓은 세상에 나간다는 생각에 잠 못 이뤘었다. 오뒷세우스는 누구인가? 오뒷세우스의 별명은 '도시의 파괴자'이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낸 사람이 오뒷세우스이다. 트로이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서 트로이를 전멸시키도록 지휘를 했기에 그를 '도시의 파괴자'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향하며 화려한 도시를 재건할 청운의 꿈을 안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다.
트로이를 정복한 오뒷세우스 이름의 뜻은 증오받는 자(the child of anger)이다. 신들의 시샘 때문이었을까? 위대한 승리자, 절대 지략의 오뒷세우스의 이름이 '증오의 대상'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일리아드와 달리 오뒷세이아의 시작에서 오뒷세우스는 이름 없는 자로 나온다. 그리고 오뒷세우스는 후반부에 자신의 정체성을 이름과 고향까지 밝히는 오만(?) 때문에 신들의 진노를 사게 된다. 오뒷세이아는 그의 이름, 즉 자신을 찾는 모험과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힌 후 받은 신들의 시기와 질투는 그의 이름이 알려주듯 역시나 증오받은 자의 것이었다. 이미 세상을 향해 승리한 그에게 정말 부족했던 것은 증오받은 자신의 인생과 자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의 큰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나를 둘러싼 일상이 싫었다. 나라는 존재를 네이밍 하는 타인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세상의 끝에는 뭔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수한 여행을 하면서 저 지도 위에 남은 무수한 추억의 별들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여행은 세상에 나가려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되어 가는 내 심연의 깊이를 이해하고 또 지평을 넓혀나가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 시절 세상에 나가고 싶었던 그 마음으로 돌아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나만의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독서이다.
3. 나의 독서 이야기
본격적인 독서의 시작은 학부 때부터다. 학부 시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어마 어마한 장서들을 매우 사랑했었다. 언제라도 대출할 수 있었고, 바라는 어떤 세상과도 연결할 수 있는 독서의 자유가 너무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독서를 좋아했지만 정작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이것저것 관심이 가는 여러 책들을 읽었지만, 그 당시 신과 삶과 사랑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앎에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책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허무함의 극단에 이르렀었다.
처음 입사한 회사는 독서경영을 매우 중요시했다. 신입 교육 시절에는 거의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고, 요약하고, 적용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어떤 책이든 하루 한 권을 읽으라는 것은 거의 중노동에 가깝다. 그것도 빡빡한 신입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밤 10시 이후의 시간에 독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독서는 그렇다 치고 이 독서의 결과물은 요약과 적용이다. 독서만 하라는 것도 힘겨운데, 그것을 정리하고 적용까지 하라는 과제는 정말 가혹하다 싶었다. 당시 나는 이 독서 과제 때문에 신입 교육을 그만둘까 고민도 했었다. 어쨌든 신입 교육은 잘 이수했고, 그때 생긴 습관으로 나는 읽고 쓰는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독서경영은 당시 회사 운영의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오너는 매년 경영 화두를 필독서를 통해 소통했다. 그것은 시중의 많은 베스트셀러들 중 익숙한 문구들 ‘초격자’, ‘혁신’, ‘돌파’, ‘이기는 습관’, ‘시간 관리’ 등이다. 약 15년 직장 생활 동안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그런 종류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독서 생활을 중단했다. 당시 읽었던 경영 관련 서적들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이 책이나 저 책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경영 관련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로는 어떤 새로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회사에서 강요한 필독서들과 경영 혹은 자기 계발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지엽적인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 좁은 방 안에서 발부 둥치고 노력하지만, 늘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에 한계를 체감하고 있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과 삶과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인생의 허무함은 더해갔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당시 나에게 삶은 인생은 끊임없이 욕망과 권태의 사이클이 돌아가는 시계추와 같았다. 삶의 권태와 더불어 나의 독서에 대한 열정도 시들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허망했던 것은 그 오랜 시간을 독서해 왔으나 내 손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모래사장의 모래를 움켜잡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과도 같은 허탈함 그것이 내 인생 독서의 중간 점검이었다. 많은 경영학 서적들은 그리고 자기 계발서들은 삶의 많은 노하우들을 얘기하는 듯했으나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내 갈증을 풀어주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4. 북클럽 아레테: 고전 독서
지난해 2021년 클럽하우스가 국내에서 유행할 무렵 ‘고전독서 클럽 아레테’를 시작했다. 아레테(arête)는 탁월함이라는 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향했던 최상의 삶을 위한 이상향이었다. 고전독서는 바로 그 탁월함에 이르고 싶은 나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대답과도 같다. 앞서 나는 많은 경영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난 후 큰 벽에 부딪혔던 경험을 토로했다.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고, 모든 책들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책들이 만족스러운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시대마다 작가마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는 큰 편차가 있다. 고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인정받은 책들이다. 작년 한 해 [소크라테스의 변론, 향연, 파이돈, 국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티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도덕경], [반야심경] 등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을 읽었다. 되도록이면 연대기 순으로 착실하게 읽고 싶었지만, 나의 무지와 조급함 때문에 넓은 고전의 망망대를 오락가락하며 길을 잃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해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무지는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나는 또 다른 지혜를 향한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 한 해의 나의 고전 독서를 생각해 보려 한다.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질문들은 젊은 시절의 반항과 두려움을 넘어, 삶의 후반부로 가면 더 큰 무게와 깊이로 다가온다. 젊은 시절 해결되지 않는 삶의 여러 질문들에 대해 중년의 내가 답해 보고 싶은 욕구가 불쑥 올라왔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고전독서와 관련한 책과 다큐를 접하면서 중년 이후의 나의 읽기를 ‘고전독서’로 재설정했다.
고전의 영어식 표현은 Classic인데 이것은 라틴어 claasicus에서 기원했다. claasicus=classis(무리, 계급)+cus(~한 사람)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는 당시의 부자 혹은 귀족 계급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당대의 클라시쿠스(claasicus)는 전쟁이 나면 재산과 군사 특히 전함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이것은 부를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와 공동체의 위험이 닥쳤을 때 솔선수범해 전투에 참가하는 지위가 높고,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탁월한 계급의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다. 가장 높은 계급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타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되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클래식은 고대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탁월한 그 무엇이었다. 요즘도 클래스는 그런 의미로 쓰인다. ‘압구정 클래스’, ‘클래스부터가 다르다’가 그런 표현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탁월함을 발휘할 때 곧 그것이 고전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된다.
클럽 아레테의 고전 독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독서법이 모델이다. 밀의 자유론이나 자서전에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아버지인 제임스 밀의 특별한 자녀 교육법 아래 성장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의 교육법은 대략 이러했다. 거의 매일 상당히 많은 시간을 자녀 교육에 할애했다. 그리고 최고의 지적 교육을 베풀기 위해 세상 어느 어버이도 기울이지 못할 정도의 노력과 주의와 인내를 쏟았다. 한편으로는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으로 자녀 공부를 지도했다.
아버지 제임스는 평소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끼고 절대로 낭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자기의 자녀를 가르칠 때에도 같은 원칙을 고수했고, 무엇보다 고전을 읽기 위한 그리스어 교육을 강조했다. 아들 존이 세 살 때부터 시작된 그리스어 교육은 극히 쉬운 단어를 영어 해석을 붙여 일일이 카드에 적어 준 단어집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존은 유아기의 기억을 더듬어 문법은 명사의 어미변화 이외에는 배우지 못하였고 단어를 약간 배운 뒤 곧 역독으로 들어갔다고 회상한다. 밀의 아버지는 저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성미가 급한 편이었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만사를 제쳐놓는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전을 읽을 수 없는 존에게 모르는 라틴어 낱말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했고, 쉴 새 없이 자녀 교육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고전을 읽고 종이 쪽 지에 메모해 두었다가 그것을 아침 산책 때 이 야이 기하곤 했었다고 한다. 대단한 교육열에 감탄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을 잘 따른 존 스튜어트 밀도 대단하는 생각이 든다.
존 스튜어트 밀 방식 독서법을 바탕으로 북클럽 아레테가 추천하는 독서의 방식은 아래와 같다.
하나. 먼저 고전 저자에 관해 쉽게 설명한 책을 읽는다. 저자에 대한 배경, 학문적 성과 등
둘. 고전을 통독한다.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그냥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더욱 좋다.
셋. 정독을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다. 특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크게 소리 내어 읽을 것을 권면한다.
넷. 독서 노트에 중요 구문 위주로 요약하면서 통독한다. 요약은 고전 독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쓰는 행위를 통해 고전 저자의 사고 능력을 조금이나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쓰면, 몇 번이고 정독할 때도 이해 불가능하던 구절들이 순간에 이해될 수 있다. 필사한 주요 문구에 대한 감상, 궁금한 점, 깨달은 점, 적용할 점 등을 기록해 두면 좋다. (빨간색, 파란색 등 유색 필기구를 활용하면 좋다.)
고전 독서가 나에게 준 통찰은 고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린 ‘인간의 무늬’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고전은 분명 단일한 저자들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각각의 고전은 어떤 거대한 체계 속에서 점증되고 발전되어 왔다. 고전은 그야말로 인류의 지혜가 들어있는 보물 창고와 같은데, 이 고전을 쓴 시대의 천재들은 하나 같이 앞선 세대의 천재들이 쓴 고전을 읽으며 과거를 반복하고, 극복하며, 성장했다. 고전독서를 한다는 것은 단편들을 읽어 나가는 단기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체계와 계보를 따라나서는 장대한 탐험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잔잔한 강물처럼 흐르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큰 호수, 바다를 이룬다. 땅이 겹겹이 쌓이듯 오랜 세월을 침전했다가 어느새 큰 산맥으로 융기하여 또 인류가 지향해야 할 큰 뜻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큰 문명사적 인류학적 흐름에 접속하는 일이다.
5.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망각을 극복하려면?
고전을 읽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리 클럽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고전을 읽는 방법 중 중요한 것은 글쓰기이다. 읽은 내용을 요약하고, 감상이나 궁금했던 점, 깨닫고 적용할 점 등을 쓰는 일은 단기 기억에 머무르는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학습 심리학자 중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 이론이 있다. 16년간 기억을 연구했던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Ebbinghaus; 1855~1909)는 여 러 실험으로 반복하는 것의 효과, 즉 같은 횟수라면 "한번 종합하여 반복하는 것" 보다" 일정 시간의 범위에 분산 반복"하는 편이 훨씬 더 기억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연구 이론은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에 입각하여, 감소하는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망각곡선의 주기에 따라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반복이 중요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망각은 학습이 시작된 직후에 시작해서 한 시간 후에는 절반을, 24시간 경과한 이후에는 약 60%를, 48시간 이후에는 약 80~90%를 망각하게 된다.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영화의 제목이 아닌 인간의 숙명이었나? 호모 사피엔스라 명명된 지혜로운 인간의 기억 능력이 이렇게 취약하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다행스럽게도 에빙하우스의 연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런 기억의 망각을 지켜내는 방법을 밝혀낸 것이다. 내 머릿속에 기억을 아로새기는 해법은 바로 ‘복습’이다. 그는 복습에 있어서 그 주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험을 통해 피험자들이 학습한 내용을 10분 후에 복습하면 1일 동안 기억이 지속된다. 1일 후 다시 복습하면 1주일 동안 지속되고, 2번 반복된 내용을 1주일 후 복습하면 1달 동안 지속된다. , 1달 후 복습하면 6개월 이상 기억이 지속된다는 놀라운 결과를 밝혀냈다. 즉, 일정한 사이클을 가지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 학습하면 단기 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실험으로 증명된 것이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에빙하우스의 이론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나는 30대 중반까지 다독을 하면서 무수한 내용의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손으로 모래를 가득 잡고 다음 금세 손아귀에서 모래는 사라지는 것처럼 책을 읽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식들은 흐릿한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써야 한다. 읽었던 책에 줄을 긋고, 감상을 적고, 그것을 요약하는 것을 통해 먼지와도 같은 기억들을 잡아 놓아야 한다. 한번 읽고 스치고 갈 지식이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덜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쓰는 것은 나의 생각을 조각하는 일종의 예술과도 같다. 그리고 글쓰기는 나의 실존 그 자체이다.
6. 망각의 역설: 잊어버리기 위해 써야 한다.
그러나 글쓰기의 목적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잊어버리기 위해 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현대철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니체의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해서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해서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례로 설명하겠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그대의 자랑에 고통을 주기 위해 그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그대의 어리석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한없이 고독한 이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여 그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새로운 가치 창조, 그것은 사자 조차도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창조,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 보라, 나의 형제들이여. 가자는 할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쾌락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시원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니체는 과거 기억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낙타로 지칭한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족제도나 국가제도에 의해 훈육되고 길들여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단계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기억’이다. 제도와 전통을 내면화하고 기억하는 것은 매우 주요한 일이다. 낙타는 무거운 의무와 강요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슬픈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인간이 사자로 변화한다는 것은 자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짐으로 지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그리고 일체의 외부의 압력을 거부하는 자유정신을 상징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를 해낼 수 있는 존재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짐들이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이때 낙타는 비로소 사자가 된다. 그러나 사자는 거부할 자유를 행사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가치 창조는 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아이야말로 기존의 가치를 망각해야 자신에게 내재한 ‘힘에의 의지’를 새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할 뿐 아니라 드디어 망각할 수 있는 존재로 소개된다. 우리가 낙타와 같은 존재로 살아가면서 강제된 규칙과 제도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놀라운 존재이다. 어린이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인 것이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의 궁극적인 종착역은 기존 기억과는 과감히 이별하고 나만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나에게 독서는 정신적 멘토를 찾는 일이다.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론을 배우고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큰 기쁨과 성장의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사상가들의 이론을 만날 때 늘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수많은 작가들의 텍스트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고전은 사유의 전통을 아우르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아래와 같이 얘기한다.
자기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못하네. …… 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네 philosophein. -《향연 Symposium》
고전을 읽고자 하는 독자 중 누군가는 사전 지식이 부족해서 어려워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스스로 지식에 충만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혜를 깨닫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나의 결여를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경청, 공감, 비판할 수 있는 기초를 발견하고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자신의 결여를 깨달은 사람만이 지혜로울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직 유효하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때론 어렵고 이해조차 되지 않는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전이 오랜 시간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생각은 책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된다. 이 생각은 마치 뇌의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끝도 없이 이어져 나간다. 책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이고, 지식과 지혜의 보고이다. 삶은 연결과 연결의 집합체이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축소될 수도 있고, 무한한 지평을 향해 뻗어나가거나 도약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인 나는 아직도 지혜에 굶주려 있다. 최첨단 과학기술은 아직도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 철학은 아직도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할 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인간의 생각과 심리를 밝혀내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다. 나에게 고전 독서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지식이나 지혜를 향한 여정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옷장 문틈 사이로 비쳐 오는 오묘한 빛을 동경하는 일이고, 저 건너편에 존재할지 모르는 네버랜드를 꿈꾸는 일이다. 나의 독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존의 체계에 편입되지 않고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즐거워하는 신성한 긍정이다. 새로운 세상을 형한 나의 열망은 이제 시작되었다. 저 문틈 사이로 비치는 비밀한 소리와 이야기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 행복한 동행을 오래도록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복이 있겠는가? 그렇다. 나에게 고전을 읽는 것은 생의 원천이고 지극히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