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읽기
지난 몇 주간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의 유명한 몇몇 책을 읽어봤다. 함께 읽을 책을 어떤 책으로 선정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중 강신주 박사의 <철학 VS 철학>을 다시 들춰보다가 ‘이거다’ 싶은 대목을 발견했다. 그가 그의 저서 서문에서 얘기한 대로 ‘우리의 현재 삶을 보듬어주고, 미래적 소망을 펼쳐 보이는 철학사가 내 눈에 별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철학사를 다시 읽는 문턱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리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 이 책이다”
어릴 적 나는 신, 절대적인 진리, 인간의 추구해야 할 항구적 가치 같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철학사 혹은 세계사의 맥락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고 열심히 독서를 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사상사, 신학, 교회사, 전통주의에 기반한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과 논리들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희망했던 신이나 불변하는 진리는 불가지하며 결코 내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절망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적 사유의 방식인 이원론은 불가지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게 신이든, 이데아이든, 절대정신이든 초월적인 존재나 개념은 결국 현실의 차원을 넘어 있으므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하다. 그것이 초월적인 것의 근본적인 한계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른 방향에서 사상사를 읽고 정리해 보려 한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서 삶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자괴감과 절망의 깊은 심연을 딛고 일어난 후 다시 시작했던 일이 독서이다. 인생 후반전에는 적어도 남의 생각을 빌려 사는 삶을 넘어, 내가 직접 지은 내 생각과 마음의 집에서 살고 싶은 욕심 같은 게 생겼다. 내가 짓고 싶은 집은 천편일률적인 그런 집이 아니다. 운명론이나 결정론, 혹은 내 집 보다 더 나은 이상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스피노자가 말대로 그간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수많은 방식으로 외적 원인에 의해 휘몰리며, 우리의 운명과 결과를 알지 못한 채 동요했다면, 이제는 작은 조각배일지라도 내 운명의 키를 확실히 부여잡고 항해하는 자유로운 배의 선장이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로 확신하는 인문학자를 만났다. 나는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의 책에서 읽는 그의 독백은 너무나 반갑다. 체제와 권력, 전통과 강요에 맞서 인간의 어두운 면마저도 긍정할 수 있는 자유! 가난하고 억압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서로 어깨를 마주할 용기!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긍정하고 사수하는 인문주의의 전선을 강화하자는 그의 주장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되돌아보면 젊은 시절 내가 절망한 것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불완전한 반쪽의 세상이고, 난해한 진리의 향연들은 어차피 알 수 없는 3단 변신 로봇 같은 허상이었다. 절망의 계곡이 깊었던 만큼 바닥을 차고 올라올 심연은 높을 것이다. 인간적 자유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드넓고 광활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올라간 그 자리에는 내가 알 수 있는 것만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만큼의 진리와 자유가 있다면 그만이다.
좋은 것이 어디 항상 좋은 것이었던가? 나쁜 것은 또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것 또한 인생이다. 슬프고 아프지만 지금 여기 나의 삶이 긍정되는 그 속에서 꽃은 피어나기도 하고, 화려함을 뒤로하고 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삶이다. 이성과 본질을 넘어 육체와 삶이 긍정되는 세상을 위해 나는 오늘 철학사의 지도를 다시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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