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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Jul 30. 2022

우정? 나의 말죽거리(?) 잔혹사

우정에 대한 쓰라린 고찰


1. 라이온킹(?)

<출처: 영화 라이온킹 >


 유년기의 나는 매우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잘 울고 쉽게 토라지고…. 엄마는 딸 부잣집 둘째 딸이었는데 아직도 이모들은 나를 보면 ‘이노무새끼 어려서 얼마나 찡찡거렸는지 모린다’라며 나를 놀려댄다. 여섯 명이나 되는 이모들은 내 타고난 성격을 기억하는 증인인 것이다. 내 기억에도 나는 좀 민감한 아이였던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의 분신과도 같은 내 아들을 나는 찡찡이라고 불렀다. 녀석이 정말 찡찡거리기도 했지만 그를 보면서 유약하고 내성적이고 착했던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곤 했다.


 내가 입학하던 해는 지금의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의 약자로 일제 시대의 잔재라 여겨져 사용이 종료되고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이 명칭의 변경은 곧 일제와 군부 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시대적 변화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국민학교를 기억하는 세대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나는 국민학교로 입학해 초등학교로 졸업하는 새로운 세대(X세대)의 기수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말수가 없었던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몇몇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둥, 거지라서 초가집에서 산다는 둥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나를 놀리고 왕따 시키는 놈들이 있었다. 하루는 내 가방이 사리진 사건이 있었는데, 평소에 나는 놀리던 녀석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가방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가방에 중요한 교과서와 학용품들이 있었고, 그걸 잃어버렸다고 엄마에게 얘기하면 혼날 것 같은 생각에 그 녀석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가방을 돌려받았던 적이 있다. 그 후 나는 녀석의 노예가 되어 전전긍긍하며 학교 생활을 이어나갔다. 등교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고, 학교 생활은 마치 지옥과 같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구체적 사실들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시절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녀석의 노리개가 되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 했다.


3학년 1학기 때 나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있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산 너머 산’이라고 했던가? 전학을 간 그 학교에서의 시작은 더 만만치 않았다. 전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고 힘 좀 쓴다는 녀석들은 돌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체격으로 기억되는 아이들의 놀림과 괴롭힘 속에서 1년을 죽은 것처럼 조용히 지냈다.


3학년 2학기 말엽이었다. 같은 반 친구(?) 중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태권도 유단자였고 전교에서 싸움 순위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녀석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내 목을 조르며 괴롭혔는데 하지 말라며 저항하던 중 나도 너무 화가 나서 녀석의 얼굴을 몇 대 때렸는데 녀석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당시 초등학생의 싸움은 누구의 코에서 피가 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증거였다. 맞다. 맞다. 이것은 명백한 나의 승리였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내가 유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비록 몸은 깡말라서 비실비실해 보였지만 나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팔도 길었다. 더군다나 태권도 유단자였던 전교 5등을 제압했으니, 그 자리는 곧 나의 자리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 학교에서 나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친구들은 사라졌다. 나를 대하는 친구들의 행동도 그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또래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인정받았고 더 이상 약자가 아닌 강자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일약 학교의 일진 대열에 들어선 후부터 나는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내가 진짜 싸움 좀 한다는 소문에 내게 시비를 걸어오던 녀석들이 생겼다. 매일 방어전을 치르는 격투가가 된 것 같았다. 싸우고 또 싸우며 내가 강하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러던 중 진호(가명)라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진호는 다부진 체격, 통뼈(굵은 뼈대), 잘 생긴 외모, 그리고 합기도 유단자고 무엇보다 우리 학교의 최강자였다.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했으므로 여느 학교의 일진과는 다른 친구였다. 진호와 친해진 이후 초등학교 내내 나는 어떤 도전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 후 진호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 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인구 5만의 군 지역의 읍내에 소재한 몇 안 되는 남자중학교였다. 이 학교는 읍내에 있는 2개 초등학교와 면 단위에 위치한 6개 정도의 초등학교(분교)에서 온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1학년 학기초에는 남자아이들 사이에 힘의 서열이 정해진다. 정말 말죽거리 잔혹사의 내용과 유사하다. 쉬는 시간이면 비교적 큰 초등학교의 일진이나 힘 좀 쓰거나 운동 좀 한다는 친구들의 대결의 연속이었다. 그중 중요한 것은 읍내에 소재한 두 초등학교 대표 간의 싸움이다. 총 5개 학급의 구성원 중 이 학교의 학생수가 70~80%를 차지하므로 웬만한 변수가 없다면 이 대결에서 학교의 통(짱을 지칭하는 경상도식 표현)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기 초 우리 학교의 통이었던 진호와 옆 학교의 통과의 대결은 진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현란한 발차기, 호신술, 유술이 혼합된 그야말로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 후 면 단위 초등학교 출신들의 몇몇 도전이 있었지만 진호에게 적수가 될 만한 녀석은 없었다. 1학년 1학기 이후 나는 초등학교 시절 싸움을 잘하는 편이었다는 것과 무엇보다 진호의 절친이라는 이유로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대열에 오르게 된다.


지금이면 이 모든 과정은 학폭으로 처벌받았겠지만


그땐 그랬다.

선생도, 학생도..

때리고 맞고...

라떼는 그랬다.


2. 자유는 어떻게 얻게 되는가?

<출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앞서 얘기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유약한 아이였으나, 그리고 힘들었던 괴롭힘의 고리를 끊고 더 이상 친구들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투쟁하는 시기도 경험했다. 다행히 중학교 시절은 큰 문제없이 학교 생활을 있어나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연약할 때 타인은 나의 그런 상태를 귀신처럼 알고 파고든다. 그리고 그런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는 나를 무능력하게 만들고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것은 개체가 관계를 맺는 자연의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상 야생은 약육강식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강자는 생존하고, 약자는 도태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약육강식은 어떤 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초원의 강자를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육식 동물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야생의 강자는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체이다. 빨리 달리는 얼룩말도, 안전한 구멍을 찾아 자신의 생존성을 보존할 수 있는 생쥐도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강자라고 부를 수 있다. 반대로 먹이를 잡을 능력이 없는 사자나 하이에나는 충분한 영양분을 얻지 못해 쇠약해지거나 동종 혹은 이종의 개체에게 잡아 먹히는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신체를 강하게 단련시켜야 하고, 정신적 성장을 위한 독서와 사고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삶의 주인공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의 자각과 자각한 것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뿐이다.


나는 대학 진학 직후 합기도장에 다녔다. 나의 우상 진호나 여느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다. 꼬박 3년을 수련했고 단증도 땄다. 합기도는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었다. 격투, 유술, 호신술, 낙법, 마루 체조, 각종 무기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실전적 무술이다. 무엇보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자신감과 능력을 얻게 된 것이 큰 성과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추어 독서가로 부지런히 고전을 읽고 있다. 이 또한 나의 지적 능력을 탁월학게 하기 위한 또 다른 나의 노력 중 하나다.


 자유란 우연히 주어지거나 필연적으로 보장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천부 인권이라든지 불가침의 자유라든지 하는 말은 너무나 개념적이고 저 멀리 있다. 특히 자유는 능력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실존의 자각과 실천의 반복은 결국 개인의 능력으로 수렴된다. 자유는 마치 초원의 얼룩말이 튼튼한 다리와 근육 조직을 갖춘 후에 얻게 되는 것생존능력이다. 잘 달리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의 자유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능력의 차이로 인해 달라질 생존 확률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타인의 간섭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3. 누가 나의 친구인가?


내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한 진짜 이유는 이제부터이다. 어린 시절 나는 의협심이 강한 편이었다. 어려서 괴롭힘을 당해봐서 그런지 이유 없이 친구를 괴롭히는 녀석들은 가만 둘 수 없었다. 특히 내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힘들어한다면 아낌없이 그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일 수 없지 않은가? 의협심 그것은 내 자아의 또 다른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유럽 최초의 서사시라고 알려진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스에는 이런 우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전투를 통해 획득한 전리품 중 자신이 사랑한 여인 크뤼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분노한다. 이 사건에 분노한 그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선언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리스 진영이 전쟁에서 패퇴하는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 일리아스의 주된 내용이다.


<출처: 일리아스, 천병희 역>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된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의 죽음 앞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분노를 거두고 자신의 친구를 죽인 적장에게 복수의 칼을 겨누게 된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 진영의 모든 전사들의 피를 대변한다. 모든 전사들은 그의 친구들을 잃었고, 그들과 같이 죽어갔던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는 자신의 명예의 상을 빼앗은 아가멤논을 향한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총사령관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적 분배의 정의가 무너진 것에 대해 자신의 복수심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분노는 자기를 넘어 친구에 대한 복수와 위기에 처한 그리스 군 전체를 구하려는 정의로운 감정이었다.    

<출처: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킬레우스 by 개빈 해밀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개인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면서 무한한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무수한 개인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관계없이 진공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적 세계관에서 각자에게 빚지고 있는 바를 갚아주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우정의 원칙을 서로에게 빚지는 채무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을 당해 힘들어한다면 아낌없이 도와주고, 친구가 잘되면 기꺼이 축하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고 또 정의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좋은 일을 행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opheilein)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친구가 잘 되도록 돕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고, 적들에게 마땅히 손해를 입히게 하는 것은 정의로운(dikaiosune)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친구에게 유리한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데도 망설이거나 포기한다면, 그것은 마치 빚을 갚지 않고 모른척하는 것과 같은 불의한 행동이다. 그리고 무릇 내가 친구라고 한다면 마땅히 정의를 행해야 한다.


 4. 나는 너의 지옥이다.

 <출처:JTBC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런 순진한 정의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그 정의로운 일이란 것도 결국 나만의 착각일 수 있다. 나의 선의가 곧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 있는 불의로 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나와 타인이 객체로 규정하고 서로 자신의 욕망을 대상으로 삼는 관계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타인에게 지옥이고 타인은 나에게 지옥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위하는 듯 하나 사실은 서로 주인공의 자리에 앉기 위해 투쟁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을 선으로 대하기도 하고 상생을 도모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의 주인공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의 자각과 자각한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결국, 타인은 지옥인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사고에 전적으로 동의가 된다.


 최근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따뜻한 사람이고자 하였으나, 그는 뜨겁다고 얘기했다. 그를 위하는 사람이고자 했으나, 나는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폭력적인 타인이었고, 아픈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그의 처지와 삶에  마음 아팠지만 나는 오늘의 나의 비인간적 모습에  좌절한다.


그에게 나는 결국 지옥이었고, 나는 아주 연약하고 무의미하고 허위의식 가득한 인간이었다는  부조리 앞에 나는  절망한다. 정말 알수가 없다. 친구, 우정, 정의  허무한 말잔치 속에 정말 그런 것들이 있을리 만무하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니체, 선악의 저편]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나의 선함도 악함도 결코 절대적인 것일  없다. 그래서  아프다.


우정 어린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이상 그의 아픈 상처를 위로하고 싸메줄  없다는 현실에 나는 오늘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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