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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y 09. 2022

삶과 죽음의 이유

<서평>왜 살아야 하는가: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미하엘 하우스캘러의 [왜 살아야 하는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10인의 사상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런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우리는 현재 삶을 이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작부터 굉장히 무겁고 비관적인 쇼펜하우어의 사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하엘 하우스켈러 교수 자신이 철학자이기 때문인지 각 사상가들의 이론은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고, 각 장 절들을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차피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가 살면서 이룬 어떤 것도 남지 않을 운명이라면, 애초에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혹은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게 중요하기는 할까? 죽음을 면치 못함에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데 이런 궁극의 질문들은 단답형의 정답을 기대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에 등장하는 대답들을 정답으로 대하기보다 세계와 세계 속 인간의 위치를 바라보는 방법을 제안하는 가설로서 읽고 이해하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독자는 자신이 이해하고자 한 현실 속에 온전히 스며들어 살아가는 ‘참여관찰자가 되어 독서하기를 독려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독자들은 단순한 철학적 문학적 사상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과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전통적 철학은 세상이 합리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이데아이든, 신이든, 이성이든 세상의 모든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고, 이 세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절대적 원리나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신이든, 세계정신이든, 초월적인 자아든 간에 중세 이전의 사상은 그런 원리와 체계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근대를 맞이한 인류는 큰 도전에 직면한다. 신 혹은 절대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한 전방위적 도전에 응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의 참을 수 없는 비참함에 대해 인류는 어떤 대답이라도 내놔야 할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신성하고 예측 가능했던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역경과 고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질병, 재해, 전쟁과 같은 끔찍한 고난을 통해 수백만 명이 다치고 죽는 경험은 신과 세계와 인생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인간을 양산했다. 이 비참한 세상을 운영하는 일반적인 목적이나 운영의 원리에 대해 철학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근본적으로 삶이 긍정적이기만 하다면 삶을 개선할 필요는 없다. 삶을 개선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은 삶에 문제가 가득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삶의 고난을 피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운이 좋아 커다란 재앙을 피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필멸하는 존재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삶은 근본적으로 명암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 살육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맹목적이고 무분별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들이 민감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렇게 살다 간 제명에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과도한 문제의식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 그러나 철학자나 정치인들은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고통의 소리, 서로가 서로를 살육하는 끔찍한 소문을 듣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 일뿐더러, 삶의 어두운 면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일 수 없다.


근대 이후에 삶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전통적인 철학, 신학적 입장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일반적으로 명확한 삶의 지침이나 목적지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성취를 얻을 수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그런 예측 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을 각자가 표상하는 방식에 따라 인식할 뿐 세상의 진정한 본성이나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우리는 주어진 세계를 인식할 뿐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어떤 목표도 목적지도 없이 그저 넓은 바다나 우주를 표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이다. 표면적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과 결혼생활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종족을 보존하려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한 책략 일뿐 사랑하는 남녀는 단지 맹목적 의지의 사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종족 보존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런 쇼펜하우어식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삶의 의지가 꺾이고 입맛이 싹 달아나는 것 같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우리가 한 없는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애초에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목적 없음’이라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인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목적 없이 주어진 삶이라 해도 그것이 꼭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여행을 생각해 보자. 여행은 궁극적으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그래야 어디로든 떠나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목적 없는 여행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니 사적 여행의 대부분은 특정한 목적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일정이나 절차가 유연하게 변경될 수 있는 ‘목적 없는 여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적 없는 여행은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로운 느낌을 만끽하게 해 주고, 기대치 않은 만남과 새로 것을 창조하는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목적이 없는 여행이 무가치하거나 허무주의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존재의 무의미함으로부터 ‘의미’가 생겨난다고 역설한다. 비록 세계는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운 장소 일 수도 있고, 우리는 생의 의지에 이끌려 다니는 맹목적 개체 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인류를 구원할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연민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생의 고통’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우리는 처절하게 그 고통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이런 고통 속에서 분투하고 있는 동료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민을 통해 우리가 모두가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통찰한다면 이 고통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삶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를 기만하는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보니 인생은 너무 짧다. 그중에서도 의무와 당연을 따르느라 인생의 절반을 살아버렸다. 이제 반평생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망의 그림자가 내 발 앞에 늘 도사리고 있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우주의 광대함 앞에 우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 삶은 마치 찰나와도 같다. 그렇다고 그 삶을 가볍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내가 먼저와 같은 존재라 자책하거나 초라해져서도 안된다. 무엇보다 거대한 체계에 나의 실존을 압도당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 사실이나 절대적 지식이나 체계가 내 존재보다 우선일 수 없다. 나의 욕망이나 실존이 배제되면 그때부터 나는 지배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 세상의 주인은 나다. 삶의 순간은 억겁의 시간에 대응되는 만큼 소중한 것이다. 나의 가치는 우주의 광대함에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보면 나의 생은 매 순간 억겁의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고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오늘 여기서 정말 불꽃처럼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자각해야 할 것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본질적으로 이 유한성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현대 과학과 의학이 모든 질병을 정복하고, 불멸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은 혹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인간의 욕망이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한 시대적 사건이다. 우리는 언젠가 무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그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우리의 정신과 몸을 망치고 있는 여러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가 모두 무로 돌아갈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직시하고 내일을 고민하기보다 오늘을 살아 내야 한다. 우리에게 언제 약속되고 희망찬 내일이 있었던가? 오늘 하루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내일은 그저 덤으로 주어진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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