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삶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고찰
들어가며: 의심과 관심사이
암벽 등반이 취미인 한 남자가 바위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수사 책임자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의심한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큰 동요 없는 아내, 여느 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용의자 선상에 올리고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용의자를 조사하는 형사와 마치 안개와 같이 마음을 알 수 없는 용의자 사이에는 의심을 넘어 묘한 관심이 점점 싹트기 시작한다.
1. 의심: 불안한 해준
서래: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이젠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수사관 해준은 유능한 경찰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게 승진도 하고 실적도 좋은 편이다. 권태로운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해준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삶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미결 사건들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만성 불면증과 안구건조증에 시달린다. 잘 나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해결하지 못한 무수한 사건들로 인해 불안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은 그의 결혼생활과 매우 닮았다.
해준의 아내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안정안이다. 재미있는 것은 안정안은 앞으로 읽어도 안정안 뒤로 읽어도 안정안이다. 그들은 주말부부로 지내며 비교적 '안정'적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더군다나 그녀의 직업은 국가적 안전을 책임지는 원자력 발전소 관리자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이들은 의무적 결혼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은 언제라도 붕괴될 위험이 있는 원자력 발전소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지구 상의 동물 중 대부분의 종은 태어난 직후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한다. 송아지, 망아지, 고양이, 강아지, 고래 등 다른 모든 동물은 태어난 직후 움직이는 방법을 빠르게 습득한다. 똑바로 서거나 젖을 물지 못하고 걷거나 헤엄치지 못하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배를 채우지 못하면 야생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력함은 곧 생이 끝난다는 뜻이다. 오직 인간만이 아주 오랫동안 무력하고, 오직 인간만이 무력한 조건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나 영유아기의 인간은 유약하다. 오직 인간만이 아주 오랫동안 연약한 존재로 살아간다. 무능력한 아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바로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서래는 해준이 미결 사건들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된다. 서래는 미결 사건들이 붙여진 상황판에서 사진들을 떼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숨소리에 따라 해준이 편히 잠잘 수 있게 도와준다. 자신의 숨소리에 따라 바다로, 물로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장면은 마치 불안한 아기를 달래는 엄마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편안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양육자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다. 불안했던 해준은 드디어 편안함을 느끼며 숙면하게 된다. 마치 엄마의 품 안에서 고이 잠든 아기처럼.
해준은 안정적인 가정의 가장, 유능한 경찰로 보인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해준이야 말로 바위산 정상에서 아래로 추락할 위기에 처한 존재이다.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는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발가벗겨지고 나약한 존재이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해준이었지만 그는 늘 의심과 불안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서래의 첫 번째 남편이 죽었던 그 바위 산처럼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촉망받는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삶이라는 험악한 파도 앞에서는 나약한 아이 같은 존재이다. 그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 것은 마치 어머니의 돌봄과 같았던 그녀의 도움 때문이다. 그녀의 숨소리를 느끼며 그는 심연으로, 물속으로 침잠한다. 그가 의심하던 것은 처음부터 그녀가 아닌 그를 둘러싼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녀는 그를 구원했다. 그를 괴롭히던 불안을 떨치고 불면증에서 벗어난 것이다.
2. 무색무취의 이유: 살인자 서래 vs 시지프스 해준
서래: “산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18, 19세기는 산업혁명, 과학기술의 발달로 밝은 미래를 낙관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세운 문명을 인간이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혼돈과 불안 속에서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만큼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삶은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는 모순 덩어리’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착각을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을 무의미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바라본다. 여기서 나는 해준을 바라보던 서래의 시선을 연상한다.
영화 속 서래는 로맨스의 여주인공인 듯 하나, 실제로는 4명을 죽인 살인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을 죽였으나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조폭의 어머니를 안락사한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녀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알베르트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연상된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한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살해했고, 그 살인에 대해 후회도 하지 않는다. 뫼르소가 살인에 대해 시종일관 무색무취의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영화 속 서래도 살인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그녀의 이런 태도 이면에 전제된 생각은 무엇일까? 카뮈에 따르면 이 세계는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선과 악을 따지는 규범 체계는 의미 없는 세계보다 더 부조리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선과 악의 경계를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어떤 일에도 허용 가능함과 허용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엇도 허용 불가능하지 않다면, 살인은 물론 모든 것이 허용 가능한 셈이 되는 것이다.
영화 내내 서래는 자신이 살해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에게 살인은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 아니다. 그녀의 살인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그녀에게 살인은 자신에게 폭력적인 인간을 향한 복수일 수도 있고, 노파의 존엄을 지키는 안락사일 수도 있다. 살인에 대한 무심한 그녀의 태도는 선과 악의 구분은 우연이나 변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녀가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이런 실존적 애매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화 초반에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한 해준이 수사 동료인 후배를 등에 지고 암벽을 등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포스가 제우스의 형벌을 받아 큰 돌을 지고 뾰족한 산 봉우리로 그 큰 돌을 옮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시지포스는 산 정상에 옮겨 놓은 돌이 꼭대기에 닿는 즉시 땅에 떨어질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벌을 수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영원한 형벌 속에 가둔 절대적인 신에 대한 적극적 반항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그는 불가침의 자유를 쟁취한다. 절대적 권력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 두었으나 그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은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그것이야 말로 그의 반항이고, 품위있는 인간으로 그를 세워 주는 유일한 행위였다.
카뮈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존재론적 회의로 전환시키면서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객관적인 체계와 의미로 가득 찬 세계 대신, 실존하는 인간이 그리는 주관적 세계로의 전환을 역설했다. 인간은 비록 나약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우리가 다른 종들보다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여전히 살만한 이유를 찾아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자살’이 아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한다. 카뮈의 미완성 작품 『최초의 인간』에서 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바다와 태양 아래 자유로이 노니는 아이의 심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다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태양은 아이들의 젖은 머리 위로 부드럽게 지고 있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광휘가 아이들의 파릇파릇한 몸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웠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며 화답했다. 그들은 삶 위에 군림했고 바다 위에 군림했다. 마치 자신의 부가 끝이 없음을 확신하는 귀족처럼 그들은 이 세계가 제공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여과 없이 빨아들였다.
(『최초의 인간』, 알베르트 카뮈.)
영화를 보는 내내 해준은 카뮈가 노래한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귀족처럼 품위 있어 보였다.
해준: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그건 자부심이에요.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어요.”
해준이 서래에게 내뱉던 이 대사야말로 삶 위에 군림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반항했던 해준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서래는 누구보다 그 자부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카뮈는 인간만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끈질기게 의미가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적어도 ‘인간’이라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삶이라는 개념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희망’이라고 역설한다. 서래에게 있어 해준은 바로 그런 존재 아니었을까? 자신의 부가 끝이 없음을 확신하는 귀족처럼 산 위에, 또 바다 위에 군림하는 그런 자부심을 가진!
3. 관심 or 사랑
해준: “우리 일이요? 내가 밤마다 당신 집 앞을 서성인 일이요? 내가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든 일이요? 내가 당신품에서 행복하다고 말했던 일이요?”
이 영화는 결국 범죄 스릴러를 가장한 멜로 영화이다. 두 주인공은 형사와 살인 용의자의 관계이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특히, 취조실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취조와 연애의 공통점은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는 이 취조 장면을 흡사 선남선녀의 소개팅을 보는 것처럼 풀어나간다. 그녀가 죽은 남편에게 폭행당한 흔적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치 그녀가 해준을 유혹하기라도 하는 듯 아슬아슬했다. 취조 중인 피의자와의 식사는 경비 처리 기준을 훌쩍 넘는 고급 일식 요리(시마시스)로 제공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해준이 서래에게 치약까지 짜주며 양치하도록 배려하는 장면에서는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연상할 만큼 달콤했다.
그러나 염세주의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는 성욕, 에로티시즘, 사랑은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종족 보존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로맨틱한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남녀는 오감을 통해 상대를 지각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나의 욕망을 투영한다.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일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도 특별한 의미를 담으려 노력한다. 이것은 일종의 왜곡이고 비약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고 또 상대방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키워 나간다.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은 종족 보존을 위한 ‘속임수’이다. 마르셀 프로스트의 말을 빌리자면,‘우리는 어떤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소녀의 얼굴에 잠깐 비친 여명일 뿐인 것’이다. 유능한 수사관인 해준은 마침내 서래가 살인자라는 증거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생각에 무너지고 깨어진다(붕괴된다).
4. 헤어질 결심-붕괴
해준: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서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서래: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서래: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해준은 잘 나가는 경찰이자, 앞으로 읽어도 ‘안정’, 거꾸로 읽어도 ‘안정’인 아내를 가진 남편이다. 그의 아내 정안이 원자력 발전소의 직원인 것도 그 ‘안정감’이 그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상징이다. 그리고 ‘붕괴’는 원자력 발전소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해준은 서래의 사랑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계략에 불과했다고 생각하고 분노를 토해내지만, 서래는 자신이 진심으로 해준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 장면에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마치 안개와 같은 회색 빛처럼, 이 세계 앞에서 모든 가치는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준의 사랑도, 서래의 사랑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착각이었던 것일까?
5. 안개: 인생은 해결할 수 없는 미결 사건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논어』 옹야편)
극 중 서래가 했던 대사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의 일부이다. 공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 즉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이 있다고 설명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과 같은 사람이다. 이들은 물처럼 움직이며 변화하는 세계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어진 사람은 산과 같은 사람이다. 이들은 정적이어서 호기심보다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므로 오래 장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서래: "저는 해준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로 갔나 봐요.”
서래: "(청록색 양동이로 흙을 파 죽은 새를 묻어주며 중국어로)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갖게 해 줘.”
서래는 바다와 같은 사람이다. 해준은 아무리 봐도 산에 가까운 사람이다. 어떤 삶의 방식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는 없다. 서래는 ‘해준’의 마음을 갖기 위해 자신이 청록색 양동이로 흙을 파묻어 주었던 새와 같이 그렇게 바다에서 사라져 간다. 서래는 그렇게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어 그의 마음에 남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과 시들해지고, 권태로운 일상에 지쳐간다면 과거의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의 자아(혹은 자아들의 연속체)는 이미 몇 번이고 죽었고, 다시 새로운 자아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변화가 없다면 오래 살아서 무엇할 것인가? 정지한 것은 이미 생명력을 다한 것과 다름없다.
6. 나가며: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
서래: “당신처럼 반듯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나와 결혼해주지 않으니까요. 당신하고 이야기라도 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헤어질 결심’은 전반적으로 비극적 여인의 삶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영화다. 독립군의 후손인 서래는 불법 밀입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필요에 관심이 없다. 애국지사의 자손에게 세상은 오히려 더 냉정하고 냉혹하다. 더군다나 공무원이 기도수와 결혼하지만 소유욕이 강한 남편은 자신의 액세서리에 이니셜을 각인하듯 그녀에게 집착했으며 잦은 폭행을 일삼았다. 세계는 마치 그녀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 살고 죽는지, 고통이 있는지 없는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기까지 하다.
마침내 서래는 바다에서 자신의 비극적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서래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자신을 소멸시켜 삶을 포기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푸른 바다로 자신을 던져 붕괴된 자신의 사랑을 다시 복원시키려는 시도 아니었을까? 서래가 두 명의 남편을 죽인 것, 자신의 어머니와 건달의 어머니를 안락사시킨 것,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기 위해 이포로 온 것 모두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또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어 영원하기 위해 반항하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푸른 바다로 자신을 던져 붕괴된 자신의 사랑을 다시 복원시키려 했던 바다 빛 원피스의 서래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이 영화를 어떤 영화라고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표정 하나로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매력적인 배우 박해일과 절제된 연기로 묘하면서도 고혹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탕웨이의 호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 디테일의 끝판왕 박찬욱 감독의 덕에 나는 이제 막 도착한 ‘헤어질 결심’의 대본을 곱씹으며, 나의 '미결 사건', '헤어질 결심'의 두 번째 감상평을 준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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