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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라는 구속

by justit

"어디냐?"
통화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위치를 묻는 친구가 있다. 굳이 어디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다.
아마도 그렇게 묻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첫 번째는 주변에 방해받지 않고 통화가 가능한 곳에 있는지를 묻는 배려 차원일 것이다. 아니면 두 번째는 그냥 "잘 지내느냐?" 하는 별 의미를 두지 않은
말일 것이다. 명어에서도 "How`s going?"이라는 말은, 정말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묻기보다는, 대화를 트기 시작하는 의례적인 건넴이다. 그래서 거기에 특별히 응답하지 않아도 친한 사이인 경우엔 무시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암튼 친구가 이 말로 시작하는 건 후자 쪽이 보다 가깝다고 여겨진다. 사실 통화하기 곤란한 경우엔 응대조차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래도 아직 그에게 그 의미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괜히 어색하게 그의 습성을 차단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크게 잘못된 태도도 아닌 데 말이다.
그런데 초기에 그런 개시 어를 들었을 때는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했더랬다. 굳이 사생활 운운 할 것도 아니지만, 전화를 받는 순간엔 마치 폐쇄회로 화면 아래 있는 느낌이 들던 것이다.
"어디에 있든 통화가 주목적이니 수신한 상황이 더 중요하지..."
그리고는 그 시점에 나는 "오, 좋겠는 데!" 하는 정도의 부러움을 살 장소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것이다.
괜한 자격지심 따위겠지만, 어느새 공간에 포획되는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고 늘 제법 멋진 장소에 나를 두고 그와 통화를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없어 바람과 구름만 소환한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이 자유스러운(?) 발길이 표적에 잡히면 비트적거리게 된다. 마치 좁은 목구멍을 벗어난 말이 나의 영토를 집어 삼킨 듯이.
말은 그렇게 신체에서 나와 공간으로 퍼질 때는 그 속박에서 풀려나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이 누군가의 전적인 지배력이 행사되는 곳이라도 그렇다.
"너네 집을 봤더니 화분이 하나도 없더라. 요즘 반려식물 어쩌고 하는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하나쯤 갖다 놓는 게 정서상 좋을 것 같은 데."
(흔한 난초분 하나라도 보내면서 그러든지...)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을 달리 변명할 것이다.
집이 오히려 지저분해질 수도 있고, 잘 가꾸지 못해 게으름을 들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 말은 하나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할 것이다.
사실 말이 그러하기보다는 상황이 그것을 좌우한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 싶은 곳에 있다면, "어디냐?"라고 하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바랄 수도 있다. 물어도 대답 없는 질문이 굳이 묻지 않아도 역방향의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공간이 할 말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묻혀 있거나 떠다니는 말을 수확하면서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말은 상황이 손을 뻗칠 때 드러난다. 매우 힘든 국면에 있는 사람은 하소연하고 싶은 말이 가득하지만 할 말을 피한다. 힘든 상황이 목구멍을 짓눌러 말을 잃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이 가볍다. 그래서 자랑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서로 쳐다보지 못하거나, 놓인 처지를 모를 때는 눈치 없는 말만 그득하다. 그래서 아무리 아날로그적이더라도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추신 : 마침내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직장에 다닐 때는 위치가 정해져 있지만, 퇴직 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직장이란 포획틀에서 겨우 벗어났는 데, 그보다 더 광범위한 구획에 묶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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