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다 배웠잖아, 청소빨래
니 할 일은 다 해놓고 나왔니?
주말을 맞아 시댁 가족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어머님이 여쭤 보셨다. 내 할 일... 뭘 말씀하시지? 잠깐 고민했다. 곧이어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청소하고 빨래 다 해놓고 나왔냐구. 햇볕 날 때 널어놔야지.”
아... 집안일 말씀이시구나. 잠깐, 근데 우리 맞벌인데? 왜 그게 ‘내 할 일’이 되는 거지? 그리고 왜 그것까지 내가 ‘체크’ 받아야 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신혼 초, 남편과 내가 일하는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내가 더 일찍 출근해서 더 늦게 퇴근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주말마다 시댁에 가면 내 할 일을 다 했는지를 물으셨다. 간혹 식재료를 챙겨주시는 날에는 굳이 나에게 조리법을 설명하시기도 했다. .
어머님 시대에는 남자는 회사, 여자는 살림이 당연했으니 그렇게 물으셨을 거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올라왔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 아들 먹이고 입히기 위해 결혼한 식모가 아니라고. 나도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벌고 있는 직장인이라고. 또 외치고 싶었다. 결혼해서 독립했으니 집안일을 언제 어떻게 누가하든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런 말은 고이고이 넣어 둬야 했다.
내가 다 도와주잖아
매주 니 할 일은 다하고 나왔니라는 질문에 노이로제가 걸려갈 때쯤, 남편에게 이 문제에 대한 내 스트레스를 말했다. 남편의 해결책은 그냥 흘려들으라 였다. 그냥 ‘네네’ 대답만 하라며. 그리곤 곧 참았던 내 분노를 터뜨리는 멘트를 날렸다.
“집안일은 내가 다 도와주잖아”라고.
우리 남편은 참 자상하다. 밤늦게 들어와서도 어질러진 집안 정리하고 빨래가 밀리는 것 같으면 세탁기도 돌린다. 물론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같이 살아서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기에 서툴긴 하지만 이만하면 훌륭하다 싶다. 그런데 집안일을 ‘도와준다’라는 그 표현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도와준다라니... 집안일의 소유권자가 나였단 말인가.
곧이어 내 분노는 아웃사이더의 랩보다 더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너랑 나랑 똑같이 일하는 직장인이며, 너나 나나 같은 학교 같은 과 나와서 비슷한 업무 강도로 일하며, 너도 나도 부모님 품에서 곱게 자라 시집장가 왔는데 나만 하루아침에 일도 하고 밥도 하는 멀티플레이어 식모가 되어야 하는 거냐며.
물론 남편의 ‘도와준다’라는 표현은 '집안일이 마눌의 일이고, 자기는 선심을 써서 그 일을 도와주는 착한 남편'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본인도 모르게 ‘집안일은 여자의 일’이라는 생각에 세뇌된 표현이었을 뿐일거다. 내 분노 역시 남편의 말보다 시어머니의 ‘집안일 며느리 소유주의’ 사고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을 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 말 한마디 못하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압박 때문에 분노가 더 커졌을 터.
이 사건 이후 남편은 철저히 표현을 달리했다. ‘도와준다’는 표현은 두 번 다시 쓰지 않고 ‘청소 내가 할게’, ‘세탁기 내가 돌렸어’로 바뀌었다. 그리고 집안일 하는 걸로 생색 내는 일 또한 없어졌다.
다만, 내가 휴직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하는 때면 철저히 집안일에서 손을 뗐다. 그러다 다시 출퇴근을 하면 곧바로 집안일을 함께 하는 모드로 전환했다. 마치 온오프 스위치가 달린 기계마냥. 영악한 시키.
군대에서 맞으면서 배웠는데 왜 못해
집안일의 소유권에 대해 선배 언니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어른들이 집안일은 여자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남자들이 집안일에 관심 없고 서툰 건 본능인가 보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선배가 한마디 던졌다.
“야, 너보다 니 남편이 훨씬 더 잘할 걸.
넌 배운 적 없지만 남자들은 군대에서 맞아가며 배웠잖아. 청소하고 빨래하고 군복 각 잡는 법까지. 아마 다림질은 너보다 훨씬 잘할 걸? 그것도 맞아가며 배웠는데 잊어버리겠니?”
생각해보니 그랬다. 해본 적도 배운 적도 없으니 못하는 게, 안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군대에서 2년간 매일같이 했던 일이잖아. 심지어 군화 광도 낼 줄 알잖아. 난 한 번도 구두 닦아본 적 없는데.
아놔.
속인 사람은 없는데 엄청 속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