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om P Apr 28. 2024

공정하다는 착각 | 능력주의에 대한 허무한 대안

예리하게 능력주의의 배를 갈랐지만,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물고기를 기르게 된다면 절대로 어항을 바다에 들고 가지 않을 것이다.

바다를 보고 나면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할 테니까.


당나귀를 채찍질하는 것보다 머리 앞에 당근을 매달아 두는 것이 더 잔인해 보인다.

더 끔찍한 것은, 이따금 당나귀를 쓰다듬으며 '고마워'라고 속사귀는 것이다.





나는 노력했고 이뤄왔다. 하지만 항상 내가 올라선 곳에 내가 원하던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빠는 늘 불만스러워하는 나에게 이런 말을 종종 했다.


"그걸 이루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어?"


하지만 내가 불만족했던 것은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이룰 때마다 '속았구나'하는 생각이 매번 들었던 이유다.




마이클 센델이 보는 능력주의의 환상은 이런 것이다.


"조금 더 노력해서 더 나은 능력을 가지게 되어야지. 그러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거야."


하지만 이에 대해 센델은 '능력은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능력은 대부분 환경과 재능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는 사실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 말미에 센델이 제시하는 능력주의의 대안을 읽고 나면 굉장히 허무하다.


"능력주의에 따른 교육 불평등(대학)"의 대안으로써 "운으로 대학을 결정하자"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불공정한 '능력'이 아닌 공정한 '운'으로 교육의 질이 결정될 것임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대학별 교육편차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능력은 운이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정하다. 그 대안은 운에 맡기도록 하는 것이다?

또는, 능력은 운이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정하다. 그 대안은 모든 것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예리한 비판에 비해 허탈한 대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정'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누군가는 사슴으로 누군가는 사자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행복할 운명으로, 누군가는 불행할 운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달성하고 이루어내면,

내 삶에 조금씩 행복을 쌓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0.1%만큼도 범고래가 될 수 없다.

전혀 다른 무언가를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어린아이들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건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얻을 수 없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 머리 앞에 당근을 걸어둔다. 그들은 대부분 악의가 없다. 그들도 머리 앞의 당근을 보고 허둥지둥 뛰어다닐 뿐이다.


그들의 발걸음이 전력이 되어 인간은 여전히 모든 종의 우두머리다. 피라미드 옥상 정원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머리 앞의 당근을 보고 허둥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멀미가 나서 뛰어내리고 싶지는 않을까?


센델은 당근을 신이 달아주는 것이 더욱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 눈앞의 당근이 결코 내 입으로 들어올 리 없음을 알아버린 나에게

그것이 한낱 인간이 달아준 것인지, 신이 달아준 것인지는 너무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책의 총평을 하자면 이렇다. "예리한 비판과 무책임한 대안". 능력주의의 환상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대안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허무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