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om P Sep 21. 2024

장애인 철학자가 삶을 마주하는 법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에픽테토스는 절름발이 노예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 따르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었다.


 계급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은 수많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린다. 질병, 명예의 실추, 빈곤 등은 많은 현대인에게 불안을 일으킨다. 코로나로 인한 질병에 대한 공포, 생업의 박탈은 생존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정부의 갑작스런 통제는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던 자유를 박탈했다.


 코로나로 인한 정부의 통제가 완화되고 나서도 여전히 현대인은 불안에 시달린다. 코로나 당시의 막대한 정부지출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 연준의 갑작스런 통화감축(고금리) 정책과 이에 따른 불황이 닥쳤다. 물론 정부지출의 감축에 따라, 근근히 버티던 영세업자들과 중소기업들의 도산도 한몫 했다. 이런 불안 속에서 우리는 에픽테토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며 행복 추구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코로나, 이어진 막대한 정부지출에 따른 자산가격의 폭등, 이후 이어진 정부지출의 감축, 미국 연준의 통화감축 정책, 그 어떤 것도 우리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한 부도, 파산, 주변인의 자살까지도 우리는 통제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에 이를 수록,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낼 수 있었겠지만, 목을 메달은 파산한 자영업자의 삶을 되돌려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을까. 우리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행복을 추구할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 에픽테토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우리 통제 하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내면의 것들이다. 우리의 성품, 상황에 대응하는 반응, 우리의 행동은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 하에 있다. 주인의 부당한 지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마음과 반응은 노예라 할지라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고뇌에 빠진 부자가 되기보다 마음 편히 굶어죽는 이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다. 억울하게 감옥에 가더라도 숙식은 해결된다. 모든 명예가 실추되더라도 우리는 떳떳할 수 있다. 파산에 이르더라도 (사회보장제도가 과거에 비해 비교적 잘 되어있으므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라도 우리는 살아남아 이성을 붙잡을 수 있다. 설령 죽음에 이르더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이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우리는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실 굶주림, 추위와 더위, 명예의 실추는 모두 우리의 이성을 제한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건강과 부, 명예는 언제든지 외부로 돌려줘야 할 수 있다. 그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으므로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본래의 자리가 우리 내면에 있었으므로, 그것은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물질적인 무언가를 잃을 때, '그것이 제자리를 찾아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력과 별개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을 비참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떠한 상황도 우리의 이성을 앗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삶은 잘 짜여진 연극과 같고, 우리는 배역을 선택할 수 없다. 다만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이 또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다. 그는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로 살았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해방되기 전까지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는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이 모든 삶의 폭풍 속에서, 그는 꿋꿋히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그의 행복의 근원은 외부의 조건이 아닌 내면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아직 요리를 먹을 차례가 되지 않았다면 굳이 손을 뻗지 않는다. 요리가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면 굳이 접시를 붙잡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의 몫에 만족하며 그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삶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이성이 그의 내면을 풍요롭게 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가지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가질 수 없을 때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말한 행복의 비결이다.


 현대인에게 SNS는 저주와 같다. 통제할 수 없는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하다. 비싼 음식과 수입차, 눈을 즐겁게하는 수많은 여행지들. 셀럽들의 명예와 인기, 명품 옷과 악세서리. 그것들은 우리가 가지려 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해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렸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욕망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사회가 굴러갈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소비에 대한 욕망을 끌어내야 생산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회적 마케팅에 우리는 속아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혀 욕망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전념할 수 있다. 오히려 불필요한 욕망들이 절제되었을 때, 우리는 주어진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에 전념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한 일에 전념하는 것이, 욕망이 선택해준 일에 전념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에 넘치는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주어진 일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소중하다 한들,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물에 뜨려면 힘을 빼야한다. 이처럼 무언가에 전념하려면 집착을 놓아주어야 한다. 마음의 평온을 가지고 나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전념할 수 있다. 주어진 배역에 충실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 도사리는 불안과 우울에 깊이 관련되어있다. 사회적 마케팅의 희생양이 되어, 물질적 욕망이 야기하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가질 필요 없는 것을 가지지 못해 일어나는 우울을 잠재우라고 가르친다.


 불안과 우울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감정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우리 내면의 감정일 뿐이므로 이성을 통해 다스릴 수 있다. 그 비결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 우리의 내면의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품과 행동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가 헛된 욕망을 놓아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내리는 에픽테토스의 처방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