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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Oct 30. 2023

피와 피부와 염색체

<플라워 킬링 문>이 남긴 의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하게 죽었답니다


<플라워 킬링 문>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일차적인 감상은 더러운 흰색 천 위에 처음 국기를 그렸을 것 같은 역겨움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오세이지족을 강제이주 시킨 땅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또다시 땅과 돈을 빼앗으려 들러붙는 날벌레 떼를 볼 때의 역겨움이었다. 그 날벌레들이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살다 죽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날아다니며 세상의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먹을 수 있었던 건 제국주의가 남긴 정신적 유산 덕분이었다. 독립전쟁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이러한 비난에서 잘 빠져나가곤 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최상위 포식자들은 주기적으로 관자놀이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며 할 줄 아는 건 돈 걱정과 그 걱정을 잠재울 범죄 행위뿐이었다. 그렇게 주입된 의식의 가장 큰 부작용은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윌리엄 헤일(로버트 드 니로)과 그의 조카인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아래를 향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반면 설탕에 취약한 췌장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배와 허벅지 여기저기에 피어나 사라지지 않는 멍 자국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이 영화를 그저 재밌다고만 느꼈다면, 당신은 약 3시간 30분 동안 눈앞에서 끊임없이 마주했던 고통을 금방 잊게 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당신과 나의 망각이 안타깝다. 잘 짜인 이야기에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난 영화관에 가기 며칠 전부터 이 글의 뼈대를 미리 구상해보려고 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분명 착취에서 끝나지 않고 학살로까지 번지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숱하게 이루어진 비슷한 시도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어디일지가 새로운 문제다. 과연 악을 어디까지 두들겨 패야 할까?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앞서나가거나 그를 뛰어넘을 때까지?


그 가정에 따르면,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들보다 더 앞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고문하게 된다. 채찍질에 몸과 마음이 다쳤는데도 결과적으로는 능력주의에 동조하는 착한 아이가 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몰리 버크하트(릴리 글래드스톤)는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선과 악의 밀도를 역전시켜 악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선을 지킨다. 이 모든 메시지를 오세이지족의 특징 그대로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석유 소유권에 눈이 멀어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는 데 동참했던 남편 어니스트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도 독을 섞은 약물을 투여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믿어보려 했다. 그러나 남편이 눈을 마주치고 망설임 없이 사랑을 말하면서도 무척이나 결백하다는 투로 그 주사는 인슐린 주사였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모든 신뢰를 잃고 문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만 남긴 몰리는 그 후로 다시는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았고(황당해하는 어니스트의 표정은 아주 잘 보였다), 뒷이야기는 스크린 속에 직접 등장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입을 빌려 몰리가 유언에 가족의 죽음과 어니스트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정도로만 전해진다. 살아있으니 빛을 발하는 별들을 보며 우주의 신비를 곱씹을 때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간 별들의 잔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속죄를 지켜보는 것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이쯤에서 이 영화는 백발의 백인 남성 감독이 백인 남성 작가가 쓴 논픽션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어니스트의 감정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데 반해 몰리의 감정은 침묵과 무표정으로 대체된다. 감정에 관한 정보의 양이 한쪽으로 쏠려 있어서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어니스트의 눈을 통해 몰리의 감정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연방 정부에서 파견했던 FBI도 결국 또 다른 백인 권력을 낳았다는 사실을 함께 짚으면 이야기는 그때부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이 영화의 후기는 노장의 건재함에 박수를 보내거나 긴 러닝타임의 즐거움을 찬미하는 글들로 가득하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 성찰하는 목소리에 열광하고 더욱 격렬하게 감사를 표하며 가해자가 알아서 반성하길 기다려야만 할까? 미디어가 선뜻 먼저 다뤄주길 기다려야만 할까? 그런 식으로 악을 처단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그들을 믿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다 죽을 때까지’인가? 매우 껄끄러운 생각이지만, 어떤 거대한 힘에 도전할 때 가끔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어 무력화하고 씨를 말려버리고 싶을 만큼 극단적으로 치닫기도 한다. 더욱이나 벗어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신체와 직결된 정체성은 그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완전히 찍어 누를 기세로 사정없이 악을 두들겨 팬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은 뒷전이 되고 악문 어금니만 남는다. 과격하게 딱딱거리는 이빨이 마침내 정체성을 잡아먹는 것이다. 피와 피부와 염색체를 포로로 삼는 정체성은 안을 향하든 밖을 향하든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제 몸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정체성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억압의 원인이 오직 한 가지라고 오해하거나 같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내가 수많은 책과 작가들의 영혼을 염탐할 때 선물처럼 나타나길 바랐던 자기 고백은 사실 자기비판의 전제 조건이었다. 모든 담론의 끝과 세상의 끝, 내면의 끝에 결국 반환점을 돌아온 것처럼 자기비판이 존재한다. 여기서 누가 악이고 선인지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그러한 분류 방식에 맛을 들이면 기다리는 건 말 그대로 하얀 악의 전형인 윌리엄과 어니스트처럼 관자놀이에 주삿바늘이 꽂혀 입꼬리가 기형적으로 내려갈 미래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끔찍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진짜 정체성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만큼 확실하고 파괴력 있는 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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