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주는 이 시간이 나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거늘, 오늘도 나는 짜증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나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는 반말과 존댓말 때문에.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책엔 보통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부부의 대화가 자주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많은 책들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반말을 하고 엄마는 아빠에게 존댓말을 한다.
왜? 왜 그래야만 할까. 존댓말을 하는 엄마와 반말을 하는 아빠가 나오는 책들을 읽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아빠가 하는 반말이, 엄마가 하는 존댓말이 당연하게 여겨질까 봐 무섭다. 무조건 아빠가 연상일 것도 아니고, 설사 연상 연하라 하더라도 부부관계는 수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존대를 하던지, 서로 반말을 하던지.
오늘 읽던 책은 심지어 외국도서다. 원서는 영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반말 존댓말이 아니었겠지만 왜 굳이 번역하면서 아빠는 반말을 하는 것으로, 엄마는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썼을까.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책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20여 년이 지나 초판 번역가와는 다른 번역가가 이번에 새로이 번역한 책이다. 두 명의 번역가가 번역하면서도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니 씁쓸하다. 집에 있는 수많은 동화책 속 엄마는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고 아빠는 엄마에게 반말을 한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아이들이 글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똑같이 반말이거나, 똑같이 존댓말로 바꾸어서 읽어주었다.
비단 동화책만의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즐겨 보는 많은 만화영화에서도 이러한 부부간의 이상한 대화는 이어진다. 심지어 극 중 엄마의 캐릭터가 굉장히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표현되는 만화에서도, 엄마는 이상하게 아빠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게 존댓말을 한다. 남편을 내 쫒으면서도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존댓말을 한다.
두 아이가 모두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가 있다. 디즈니 주니어 채널에서 방영되던
꼬마의사 맥스터핀스다.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보았는데 보다 보니 와, 하고 홀로 감탄을 하게 되는 신선함이 있었다.
최근 디즈니의 추세이기도 하지만, 먼저 주인공이 유색인종 여자어린이다. 그동안은 백인 남자아이가 주인공을 맡는 게 당연했었다. 그리고, 닥 맥스터핀스의 엄마는 소아과 의사로 일을 하고, 아빠는 집에서 요리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그동안은 볼 수 없는 가족관계 설정이라 참 신선했다. 또 시즌 후반에 가서는 막내 동생을 입양한다. 입양을 준비하는 과정, 입양 후의 가족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해서 아이들과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만화의 주 내용이 되는 닥이 장난감들과 대화하는 능력은 닥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 집안의 딸에게만 한 대를 걸러 유전(?)되는 특별한 능력이다. 그래서 닥 아빠도, 남동생도 아닌 닥이 장난감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래서 치료도 할 수 있다. 책이나 미디어 속 남녀차별을 참으로 거슬려하던 내가 보기엔 참으로 반가운 설정이었다. 와, 이런 만화가 있다니.
꼬마의사 맥스터핀스의 매력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즌3의 13회 너는 정말 특별해 편은 정말 특별하다.
줄줄이 이어 원숭이라는 여우원숭이장난감이 있다. 이 장난감은 만세 모양을 한 여우원숭이들을 서로서로 이어서 연결하여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디즈니 화면 캡처가 어려워 안타깝다) 그중 와이어트라는 여우원숭이가 왼쪽 팔이 없다. 나는 닥이 다른 대체품을 활용하여 이 여우원숭이에게 팔을 만들어 붙여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닥은 늘 그렇듯 진찰을 하고 병명을 알려준다. 공장이 만든 작품 증후군!
그러고는 꼬마의사 닥은 와이어트에게 이런 주옥같은 말들을 한다.
넌 팔이 없는 이유가 없어. 넌 건강해. 넌 공장에서부터 팔 없이 만들어졌어.
그러니까 너는 고장 난 게 아니란 말이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지.
넌 건강하니까 한 팔로 뭐든지 할 수 있어.
슬퍼하지 마 원래 이 모습이니까.
다른 애들과 다른 모습 너는 정말로 특별해.
이게 네 모습. 진짜 완벽해. 넌 세상에 오직 하나
(대사 출처_디즈니 주니어)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눈물이 찔끔 나게 감동적이다.
캡처가 안되어 너무나도 아쉽지만, 부족한 글 솜씨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른 여우원숭이 네 마리가 점프를 하여 방에 있는 전등갓에 거꾸로 발로 매달린다. 그다음 세 마리가 점프하고 먼저 매달린 네 마리가 세 마리의 발을 잡아 준다. 다음 두 마리가 점프를 하고 역시 먼저 매달린 세 마리가 발을 잡아준다. 마지막으로 와이어트가 점프를 하고 두 친구들이 발을 잡아주어 와이어트도 멋지게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있지도 않은 팔을 억지로 달아주며 남들처럼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고, 완벽하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몹시도 감동적이고, 신선했고, 멋있었다.
존댓말과 반말로 시작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까지 왔다.
자라면서 가치형성을 해 나가는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이기에 유독 나는 동화책과 만화에 민감하다.
성인이 되어 접하는 것들은 자기 나름의 가치판단이 하겠지만 어린이들은 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어른들이 한번씩은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나라 동화책 중 유일하게 부부사이 반말을 해서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준 동화책이 있다.
김영진 작가님의 그린이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