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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랬구나 Dec 07. 2023

프랑스 비닐봉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이들이 등교하고 난 수요일 오전. 베란다 창고 정리하기 딱 좋은 날이다.

아이들은 왜 유독 엄마가 버리려고 하는 물건에 관심이 많은지, 버리려고 들고 나왔다가 현관까지 가기도 전에 아이들한테 붙잡혀 못 버리게 된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수요일은 우리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 배출의 날이므로, 아이들 눈에 띄지 않게 바로 버릴 수 있는 정리 최적의 날이다.


라떼 한잔 진하게 내려서 카페인 충전 완료.

주기적으로 한 번씩 주방에 딸린 베란다의 수납장을 열어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대충 쑤셔 넣어 둔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준다. 그중 오늘 특히 엉망이었던 곳은 모아둔 쇼핑백들. 모두 꺼낸 후 버릴 것은 버리려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는데 옴마야~ 소리가 절로 나오는 비닐봉지 뭉치가 나타났다.


반듯반듯한 쇼핑백들 사이에 고이 접어 둔 이국적인 비닐봉지들.

이것들로 말하자면, 2011년 신혼여행을 갔던 파리와 로마에서 물건 살 때 받았던 비닐봉지들이다.

처음 가본 유럽이었기에 봉지마저 소장하고 싶었나. 나는 캐리어에서 꺼낸 그 봉지들을 곱게 접어 보관했었다. 이렇게 창고 정리 할 때마다 한 번씩 나타나줘서 파리와 로마의 추억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또 정리에 지쳐갈 때쯤 이런 것들 만져보며 너무나 신났던 일주일을 떠올리며 웃기도 한다.


비우기에 재미 들린 요즘, 이걸 가지고 있어 봐야 뭐 하나 싶어서 사진 한 장씩 찍고, 브런치에 글로 하나 남기고 정리해야겠단 생각으로 다시 넣지 않았다. 퇴근한 남편에게 보여주니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한다. 그런데 또 버리지는 말고 가지고 있으란다. 응?? 기억도 안 난다며.



신기하게도 봉지마다 대충 어느 가게에서 받은 건지, 혹은 무엇을 살 때 받은 건지 생각이 난다.

(아래 모든 내용은 2011년 기준이며, 현재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


누가 봐도 에펠탑 기념품 샵 같이 생긴 이 봉지는 에펠탑 안에 있었던 기념품가게 봉지다. 나는 저기서 에펠탑이 그려진 자그마한 술잔세트, 에펠탑이 그려진 그림 하나, 그리고 회사 동료들에게 줄 열쇠고리 같은 걸 샀던 것 같다. 술잔세트는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또 아쉬워서 싱크대 수납장에 모셔뒀고, 에펠탑 그림은 지금도 거실에 있다.


 


이 봉지 역시 나 루브르요~ 하는 듯하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있는 쇼핑몰 같은 곳이었는데 여기서도 선물용 열쇠고리나 냉장고 자석들을 샀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아침에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남편은 전혀 기억 못 함.


파리 봉마르쉐 백화점 비닐봉지. 무엇을 사러 갔다기 보다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이라기에 관광지 느낌으로 방문했었다. 식품관에 가서 홀린 듯 마카롱을 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봉지는 아무리 봐도 의류 느낌이고 불어는 잘 모르지만 대충 남성복 느낌인데, 파리에서 옷 산적 있나 여보?



보관할 때는 몰랐는데 오늘 찬찬히 살펴보니 Castroni라는 이름이 같다. 분위기는 몹시 다른데 한 계열사(?) 느낌이다. 검색해 보니 식료품점이다. 우리는 로마에서 와인 두 병을 사서 캐리어에 넣어 한국까지 가지고 왔는데 아마도 저기서 샀던 것 같다.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진열장 가득 들어차있는 와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 그 와인 두 병은 아까워서 못 먹다가 아직도 창고에 있다. 지금은 먹으면 배탈 날 것 같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비누를 좋아해서 외국에 가면 그 나라 비누를 찾아다닌다. 왼쪽 coin이라고 적힌 검정 쇼핑백은 비누를 산 곳이라고 정확히 기억난다. 그 당시 드럭스토어 느낌이었는데 오늘 검색해 보니 백화점이라고 나온다.

오른쪽 비닐봉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공항이나 기차역에 있었을 법한 기념품 가게 봉지 같다. 아마도 냉장고 자석을 샀을 것 같다.



꼬깃꼬깃한 봉지들을 하나하나 펴고 있자니 기억도 하나하나 살아난다.

참 그립다. 나의 젊음이. 파리의 낭만과 로마의 웅장함이.

그런데 남편은 기억이 잘 안난다니... 다시 가면 되겠다 그치?



번외 편이랄까. 파리나 로마에서 가져온 건 아니지만, 아끼던 비닐봉지 2장을 추가로 기록한다.

왼쪽은 지난여름 남편이 LA 출장 갔을 때 다녀온 디즈니 기념품샵 비닐봉지.

오른쪽은 남편이 5년 전 출장 갔을 때 다녀온 유니버설스튜디오 봉지. 둘 다 참 미국 스럽다.  


이렇게 추억은 기록으로 남기고, 봉지는 일상생활에 활용하고 그 쓰임을 다하면 버리려고 했는데.

신혼여행 기억도 몇 장면 밖에 남지 않았다는 남편은 계속 간직하라고 한다.

내가 꺼내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거면서. 못 버리게 하는 건 아이들이나 남편이나 똑같다.

이래서 물건 정리는 수요일 오전이다. 오후 안됨. 절대 안 됨.


로마의 저 카스트로니 노란 봉지, 며칠 전에 이웃의 친한 언니에게 귤 나눠 줄 때 담아주었으면 딱 예뻤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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