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층 할머니의 지팡이

by 그랬구나

우리 아파트 입구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있는데 그곳은 늘 11층 할머니가 지키고 계셨다. 아이들의 스케줄에 따라 아파트 입구를 자주 오가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를 마주쳤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할머니와 나의 대화는 늘 ‘애기 엄마 어디가?’로 시작해서 ‘아들만 있음 나처럼 외로워서 못써. 딸 하나 더 낳아 아직 젊으니깨.’ 로 마무리되었다.


아들만 셋 있으시다는 할머니는 결혼 안 한 막내 아드님과 사시는데 막내 아드님이 출근하고 나면 하루 종일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여기 나와서 사람들 구경하려고 앉아있는 거라 하셨다. 그래서 아들만 둘인 나를 늘 안쓰럽게 여기시며 지금이라도 하나 낳으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어서 ‘하나 더 낳아도 아들일 거 같아요.’ 하며 멋쩍게 웃으면 할머니도 그럴 것 같다며 웃으시곤 했다.


할머니의 고향도 나의 친정과 같은 곳이어서 11층 할머니가 말씀하시면 꼭 우리 외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나의 공통된 인맥이 한 분 계신데, 바로 야쿠르트 매니저님이다. 매일같이 할머니댁으로 배달을 하시는 매니저님을 보며 할머니는 야쿠르트를 무척 좋아하시나 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는 야쿠르트 매지저님의 다정한 말이 좋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께서 하루는 무척이나 심각하신 얼굴로 나를 붙잡으시며 이것 좀 도와달라고 하셨다. 무슨 일인지 여쭤보니, 야쿠르트 전화번호를 못 찾겠다 하시며 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하셨다. 할머니의 폴더폰에 매니저님의 번호를 꾹꾹 입력해 드렸다. 할머니는 보물이라도 찾으신 것처럼 아기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할머니는 참 고우셨고, 늘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셨다. 처음에는 지팡이를 짚으시며 운동을 하셨는데, 나중에는 기력이 더 떨어지셔서 노인용 유모차를 밀고 다니셨다. 날이 더우나 추우나 늘 운동을 하시는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주일에 한 번 있는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수거의 날이었다. 1층 현관에서 11층 할머니와 닮은 중년 남성이 물건을 한가득 들고 나오는데 익숙한 지팡이가 눈에 딱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할머니가 안 나와계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 경비아저씨에게로 뛰어갔다.


“요즘 11층 할머니 안보이시는데, 어디 가셨어요?”

“돌아가셨어요. 폐렴이 갑자기 와서 그렇게 되셨대요.”


순간 너무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라 뭐라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마주친 야쿠르트 매니저님께 말을 걸었다.


“할머니 소식 듣고 너무 놀랬어요. 건강하셨는데.”

“나도 너무 놀랬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매니저님은 말씀하시면서 눈이 빨개지셨다.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걸 알았다면 조문을 갔을 텐데, 마지막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컸다. 얼굴도 잘 모르는 먼 친척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상실감이 컸다.


할머니의 빈소는 찾아뵙지 못했지만 아파트 11층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곳에선 외롭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지팡이 없이 뛰어다니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편안히 쉬세요.”


고철류에 들어있던 할머니의 그 지팡이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의 건강하게 사시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있던 그 지팡이가 찌그러진 맥주 캔 사이에 놓여있는 모습은 너무도 가슴 아픈 한 장면이었다.

작가의 이전글엄마를 모시고 큰 병원에 다녀온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