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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아바 Jan 18. 2023

1-3. 이런 나라면 혼자 살 수밖에

첫 번째 관찰│이상한 만남

어려서부터 막연히 혼자 살아갈 미래를 그렸다. 내 주변엔 온통 “남자 때문에 신세 망친” 여자들뿐이었다. 미용사인 엄마는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일했지만, 이혼한 아빠가 저질러 놓은 빚을 대신 갚느라 늘 허덕였고, 이모들의 결혼 생활 역시 누구 하나 평온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들은 우연히도 다 편모 가정이었고,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기혼 여성들은 결혼 이야기만 하면 말투가 거칠어졌다.


펜팔과 채팅, 번개팅으로 상대를 만나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에서 과 후배와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가장 먼저 한 말은 “한 놈한테 코 꿰이지 말고 다양한 남자 만나라”였다.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처음 맞선 본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우리 엄마였다. 아빠는 엄마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단 하나도, 아니, 싫어하는 모든 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를 낳고 이혼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동생이 생겨서 계속 살았다는데, 그렇게 안 맞으면서 어떻게 동생이 생길 수 있는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연애를 꾸준히 하면서도 번번이 상대를 무시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대충 흘려들었고 소중히 꺼낸 진심도 볼 줄을 몰랐다. 누군가 고백하면 일단 만났고, 한쪽만 뜨거운 연애를 하다가, 미지근하게 헤어졌다. 마음을 제대로 준 적 없으니 헤어져도 아프지 않았다. 헤어진 다음 날에도 아침부터 외국어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출근해서 일하고, 별일 없이 잘만 살았다. 엄마는 언제나 헤어진 남자친구들을 걱정했다. “너 같은 애만 안 만났어도 걔는 잘 살았을 텐데, 안쓰러워서 어떡한니”라며.


누굴 만나 봐야 어차피 상처만 줄 테고, 혼자서도 외로운 적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성욕도 없으니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 결혼은 안 하고 아이만 낳고 싶다는 친구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날 닮은 자식을 낳는 건 결혼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른한 살이 되던 해, 마지막 연애를 끝마치고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 어쩌다 호기심을 보이며 접근하던 남자들도 내 입에서 ‘서른’이 나오는 순간 눈빛이 식었고, 서른둘을 지나 서른셋이 되던 해에는 다니던 회사마저 관뒀다. 모아둔 돈 없고, 번번한 직장도 없고, 집안에 빚 많고 나이까지 많은 여자, 그게 나였다. 모든 조건이 나의 비혼을 돕고 있었다.




서른셋 10월에 퇴사를 하고 11월, 곧바로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퇴사한 곳은 지역에 있는 한 국립대학이었고, 지난 몇 년간 국제교류 업무를 맡아 한 터라 유럽 전역에 아는 학생들이 있었다. 출장은 자주 갔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끌고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시작한 여행은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독일, 아일랜드를 거쳐 네덜란드에서 끝이 났다. 몰랐다. 고작 45일 만에 항복하듯 한국행 비행기를 탈 줄은.


한국이 싫다고 생각했으니까. 영어를 할 줄 알고, 국제교류 업무로 맺은 인연들도 많으니까, 다른 나라에서도 일하며 살 수 있겠지, 믿었다. 애정 없는 가족들이야 그냥 끊어버리면 그만이고 어차피 나는 늘 고아를 꿈꿨으니까, 친구들만 있어도 사는데 문제없다, 자신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다 착각이었다니. 오스트리아 빈의 4인용 숙소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낯선 나를 만나버린 그날, 마음속 무덤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창밖이 어둑하도록 울음이 멈추지 않던 이상한 날이었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죽어도 되지 않을까?’ 고등학교 3년 내내 이상한 질문들만 품고 살았다. 나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혼을 선택한 뒤, 엄마는 늘 고단했고 남동생은 늘 외로웠고 나는 늘 불안했다. 아빠도 없고 내 방도 없고 주말 계획도 없는 나의 초라함이 언제 들통날지 몰라서, 가면 같은 명랑함과 자신감이 언제 민낯을 드러낼지 몰라서, 엄마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물이 언제 터져 나올지 몰라서, 친구들이 아는 나와 나만 아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무서웠다. 그때부터였다. 마음속에 진심이라는 무덤을 쌓기 시작한 것이.


쌤은 연애 안 해요?”

별로 관심 없어서요.”

“아, ‘비혼주의’이시구나?”


비혼주의까지는 아니었는데, 세상은 이미 나를 ‘비혼주의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주의자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는 30대 여성은 왜 ‘비혼주의자’가 되어 있는 걸까. 다수가 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왜 내가 원하는 삶은 ‘OO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돌아오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고...” 설명하기는 또 얼마나 구차하고 귀찮은가. 그래서 그냥 살았다. 대화를 빨리 끝낼 수 있는 ‘비혼주의자’로.



그런데 그날, 알아버렸다. 그 비혼주의자가 얼마나 간절히 결혼을, 아니 누군가와 화목하게 사는 삶을 원하고 있는지를. 혼자서도 괜찮아서가 아니라 ‘이런 나라면 혼자 살 수밖에 없다’고 나조차 나를 포기해 버렸음을. 혼자 떠나온 유럽에서 또다시 혼자 남은 그날 그 방에서 느닷없이 깨닫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나는 이미 ‘비혼주의자’였고, 회사는 관뒀고, 모아둔 돈도 없이 여행 중인 서른셋이었다. 이렇게나 혹독한 겨울이라니. 이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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