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길을 꿈꾸게 한 책, 『청춘의 독서』-2편

한 손에 택배 박스, 또 다른 손에 핸드폰을 든 채, 책을 읽다.

by 주택야독

(1편은 총평 중심, 2편은 디테일한 책의 내용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청춘의독서(교보문고).jpg

(책 표지 사진 출처 : 교보문고 홈페이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죄와 벌』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체제로 현실이 되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전한 권리를” 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었다.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죄와 벌' 파트를 읽으며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의 논리에 순간 미혹되었다. ‘비범한 소수'가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괜찮다는 전체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 파트의 끝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결국 선한 목적은 선한 방식으로만 이룰 수 있다.’ 어찌보면 다행이라는 감정이 차올랐다. 전체주의에 대한 예시와 설명을 들으며 그것들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나약한 나는 할 수 없었다. 그것들에 무지했고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내 지식 수준의 처참한 현실을 알 수 있었고, 스스로 얼마나 수동적인 사고 회로를 가진 인간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선한 방식만이 선한 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지 혼자 능동적으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선한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 누구도 피해입지 않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이면 다 선할까? 아니, 그 누구도 피해 입지 않는게 사실상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 어떤 인간도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건 익히 아는 상식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자.

선한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거 것이다.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진실, 진리를 향한 성찰, 인식과 삶의 일치를 중요시 여겼던 리영희 선생. 유시민 작가님의 지적 은사라는 그 분의 글(전환시대의 논리)을 접하며 처음으로 내가 바라던 삶을 깨달았다. ‘지식인'으로서의 삶. 한때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런 꿈을 이루는 삶 역시 만만치 않게 어렵다는 걸 안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난 그런 거부보단 ‘지식인'이 되어 이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대학교는 공과대학에, 지금껏 읽은 책도 보잘것 없는 '나'지만, 꾸준한 독서와 성찰과 숙고, 주변과 사회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관찰을 통한다면 부족한 나라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보았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그러나 마르크스가 모든 점에서 틀리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 비판 이론으로서 가치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화, 글로벌 시장, 금융 독점자본의 출현,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금융 위기와 산업공황, 끝없이 실업자와 산업예비군을 만들어내는 노동 절약형 기술혁신, 심화되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비록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어찌 고맙고 귀하지 아니한가.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그 시절 참으로 신박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들이 이기는 세상.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수많은 노동자들, 일반 서민들이 정말 혹할 이야기였다. 택배기사인 나 또한 그 시절 사람이었다면,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출생을 정하고 태어나진 않는다. 누군가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가난한 서민으로 태어난다. 그러니 부자(자본가)는 근본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한 존재가 아니다. 그 위치가 그의 자본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사회 역시 어떻게든 권력과 명예를 쥐는 계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이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었다고 한들, 권력을 쥐면 그 때의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모든 사람은 각자의 입장이 있는 법이다. 반대로 그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면 모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었던 마르크스의 이상. 그것을 악용하는 세력들이 문제였다. 소련, 북한, 중국 등.. 그들의 악용이 멈추길 바랄 뿐이다.



토머스 맬서스, 『인구론』


인구 증가가 식량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이러한 수준의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초과해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사망으로 여분이 생기지 않는 한 반드시 사망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아무런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서는, 사망률을 낮추는 일이나 자연의 작용을 저지하려는 어리석고 헛된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촉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 만일 끔찍한 기근이 너무나 자주 찾아오는 것을 피하려면 모름지기 다른 형태의 자연적 파괴 작용을 적극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청결한 생활이 아니라 불결한 습관을 권하는 편이 좋다. 도시의 골목을 더 좁히는 한편, 많은 수의 인간을 좁은 가옥에 군집시킴으로써 페스트가 다시 찾아들도록 해야 한다.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맬서스의 ‘인구론’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빈곤의 확대를 막기 위해 오히려 빈곤층의 생활 환경을 고의적이지만 교묘하게 악화시키고 그들을 죽음의 위험에 밀어넣어야 한다는 것.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냉혹한 이야기였다. 빈곤층은 우리가 돕고 관심을 가져야하는 사회소외계층이라는 내 편견을 전면 부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맬서스에게도 큰 오점이 있었다. 빈곤층은 무식해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위해 피임은 절대 안된다는 것. 평생 고치지 못한 이 두 가지의 편견은 그의 이론의 설득력을 약화시켰다.

이번에도 역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밝은 곳이길 바라나보다.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사회적 기술적 분업의 발전과 더불어 일상생활과 사고 습관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약탈적 활동이 점차 생산 활동으로 대체되자, 성공의 지표가 약탈의 전리품에서 축적 재산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산업이 성장할수록 축적된 부가 명성과 존경의 더 중요한 인습적 기초가 되었다. 이제 사회에서 명성과 지위를 얻으려면 재산을 축적해야만 했다. 부는 약탈의 전리품을 대신하여 능력을 공인받는 훈장이 되었고 타인의 존경을 불러오는 독자적이고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부의 유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든 부모를 잘 만나서 상속을 받았든 상관없이 부는 명성의 인습적 기초가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능력의 증거로 평가되던 부의 소유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굳어지는 것이다.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돈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많던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의식주 해결이 힘든 극빈곤층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직 돈이 많아보지 않아서, 돈으로 무얼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나를 마주했다. 그러나 택배일을 하면서도 내 또래들의 평균 연봉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어떻게든 우월감을 발굴해내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돈의 많고 적음이 그 절대적인 양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비교대상인 것이다. 그것도 너무 위쪽으로 수준 차이가 나지 않는 상대여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나 큰 무력감과 괴리에 좌절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물론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겠지만. 돈을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어차피 나보다 더 부자인 사람은 무조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을 이기도록 더 많은 돈을 벌면 될까? 과연 그게 맞을까? 내 대답은 단연코 ‘NO’다.

돈에 대한 제한이 없다면 내가 무얼 하고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았다. 난 책을 읽고 글을 쓸 것 같다. 유튜브도 취미로 할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여행을 자주 다닐 것이다. 그거면 된다. 그럴려면 얼마 정도가 필요할까? 수십억? 수백억? 아니면 몇 억? 아니면 월 천?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게 되는 날이 평생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만약 오더라도 마음 편히 여행만 다니며 살 순 없을 것이다. 또 다른 걱정거리와 불안이 찾아올거니까.

다른 예로 영끌해서 내 집 마련하면 행복할까? 수십년 동안 매달 몇백 씩 은행에 상납하는 삶. 과연 행복할까?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럼 집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평생 월세에 산다는 생각으로 살면 자유로울까? 행복할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주변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해 안정되어 가는 지인들의 모습을 보면, 혹은 수 억씩 뛰어버린 집값을 자랑하는 누군가를 보면 속이 베베 꼬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어떤 선택에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걸로 먹고 살기위해 발버둥치다보면, 나를 스쳐가는 많은 인연과 물질들, 다양한 순간들과 추억들을 그때 그때 만끽하고 기억하는 것. 그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성공의 지표가 약탈의 전리품에서 '축적 재산'으로 옮겨온 현재. 어떻게든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든 더 많은 재산을 쌓기 위해 악착같이 사는 것이 옳은 삶일까? 부의 출처는 상관없이 그저 부의 소유 자체만 중요한 지금의 사회. 그 사회 물결 속 하나의 물 분자가 되어 같이 휩쓸리는 것이 과연 맞는 삶일지 스스로 의심이 든다. 나 또한 부자되기를 강력히 염원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해보자. 평생토록 무슨 일을 하든 절대로 난 부자(유한계급)가 될 수 없다면? 무슨 삶을 살 것인가? 글을 쓸 것 같다. 얼만큼의 가치가 될지 모를 내 사소한 삶을 어떻게든 간직하고 기억되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토지 사유는 커다란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둘 사이에서 갈리고 있다.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나에게 뜻밖의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왜 세상은 발전해 나가는데, 빈곤층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왜 빈곤층에게는 진보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토지 독점에 있다는 헨리 조지의 주장. 크게 공감되었고 무척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소득세와 거래세를 폐지하고 오직 토지소유주에게만 세금을 징수하는 이상적인 제도. 상당히 탐스럽고 마음이 가는 제도였다. 동시에 내가 땅주인이 되었다면 참 말 같지도 않은 제도라고 비난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나도 특히 이기적이다. 나도 건물주가 되고, 땅주인이 되고, 부동산 부자가 되어 매달 넉넉히 들어오는 불로소득에 가득 취해보고 싶다. 혹시 내가 조지의 주장에 마음이 움직인 게 내가 땅 하나, 부동산 하나 없는 가난뱅이라 그런 건 아닐까? 그래도 어느 사회나 부자보단 빈곤층의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제도나 법이 더 옳은 건가? 충격적이면서도 참 어려운 주장 같이 보였다.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신문사와 대기업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편성권을 장악하고, 대기업이 광고주의 위력으로 다른 미디어까지 간접적으로 조종하면서 인터넷 포털까지 좌지우지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한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기는 시민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카타리나 블룸이 묻는다. “그대는 신문 헤드라인을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1등 언론사가 한 사람, 아니 그 사람의 주변까지 거짓을 통해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소설이 한때의 영국을 실화로 한다는 점. 인물들의 대화와 극단적인 행동, 블룸이 경찰에게 자백하는 장면까지. 비록 발췌된 짧은 구절이었지만 숨죽이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동시에 역지사지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큰 폭력과 아픔을 타인에게 선사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시민 작가는 이 파트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故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15개월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 해가 2009년이었다. 내 나이 13세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팬카페인 '노사모'의 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봉하마을로 향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정치색이 워낙 짙으신 아버지 영향으로 난 노무현 대통령이 대단한 분이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지금은 아버지의 주입식 교육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둔 탓에 꽤 벗어난 상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사건에 대해 어느 정치 진영의 말이 맞는지 확실히 모르겠다. 이건 내 노력의 부족일 수도, 내 인지능력의 부족일 수도 있다.

이런 불명확한 주관을 가진 난 최근 우연찮게 봉하마을을 한번 더 방문했다. 2009년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상태였다. 특히 '노무현 기념관'의 전시는 정말 가슴이 벅찰 정도로 훌륭했다. 그 분에 대해 몰랐던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으며, 부족한 내 주관에 벽돌 몇 개를 쌓을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전시를 따라 그 분의 거칠고 유별났던 삶을 돌아보았다. 특히 가슴에 남았던 것은 그 분의 연설이었다. 그분의 '이상적인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평소에 말씀하시고 다니던 분이 그런 비극적인 결심을 하신 것이 참 가슴 아팠다.

그 날 봉하마을의 방문 후, 문득 이 책이 재차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의 중립적 보도와 책임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깊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이 가진 힘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전통 매체, 온라인 매체, 유튜브 등 다각화되는 언론 매체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분산되어 가벼워졌기에 극단적이거나 거짓된 보도 또한 많아졌다.

따라서 언론 매체를 접하며 읽고 판단하는 우리 독자들의 시각을 다각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국적과 고향과 부모 형제를 선택한 이도 없다. 우리는 온갖 것을 ‘운명’으로 받아 안고 세상에 나온다. 주어진 사명 같은 건 없다. 정해진 의미도 없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살러 왔다.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남의 방식을 따라 살 필요는 없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청춘의 독서(특별증보판)>, 유시민 - 밀리의 서재

존 스튜어트 빌의 ‘자유론’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수도권 4년제 공대 전액장학생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고 안정될 수 있었던 나의 삶. 그걸 포기하고 택배기사라는, 어떻게 보면 사회 가장 밑바닥 계층(근무 중 스스로 자주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음. 사람들의 시선이나 대우에 관한 측면. 다른 기사님들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님)에서 불안과 후회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사투하며, 한걸음씩 나아가는 내 현재의 삶. 매번 과거의 선택을 의심하고 다른 경우를 상상해보며, 스스로 자책하고 무기력에 빠지던 지난 날들..

빌은 이야기했다. ‘스스로 설계한 삶은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 난 늘 그런 식이었다. 미래에 대한 명확한 계획 없이 무작정 낙관만 일관해왔던 나였다. 대입에서 기대하던 결과를 거두진 못했더라도, 나보다 낮은 친구들과 비교하며 안도하고 우월감에 자아도취하던, 아주 저질스러운 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인생을 빙 돌아서 가고, 늦춰질 대로 늦춰지고, 방향을 완전히 전환해버린 건, 어쩌면 이미 신이 나를 위해 예비해놓은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옳다는 방식대로 삶을 살아내자. 그것만이 절벽 앞에 몰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지식인의 길을 꿈꾸게 한 책, 『청춘의 독서』-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