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디자인 스토리 1탄
이번 글은, 내가 상해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가끔 인스타 스토리에 질문 올릴 때면 항상 받는 질문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상해에 가게 되셨어요?"
"왜 상해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하세요?"
라는 질문을 주신다.
나의 답변은 "상해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돼서 왔어요."라고 심플하게 이야기 했었는데, 사실 그 심플함 뒤에 숨겨진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볼까 한다. 꽤 긴 글이 될지도 모르고, 그 긴 이야기를 다 하는게 맞을까 의문이지만, 내가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의 현재의 내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써보려고 한다.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친구 엄마이자 미술 선생님이신 분에게 배웠고,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분이 동네 상가에 차린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릴 적부터 유독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그래도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장래희망이 뭔지 써낼 때 엄마의 희망도, 나도 패션 디자이너라고 쓴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마 어려서 구체적으로 잘 몰랐을 테지만 그게 좋아 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미술을 떠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중3 때부터 입시 미술 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고, 나의 지난 학창 시절은 사실 그림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공부보다는 그림에 치우친 생활을 했었기에, 그중에서도 수채화를 참 좋아했어서 입시 미술도 석고 정물 수채화를 했었다.
처음부터 디자인과를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를 좋아하고 색감을 다루는 게 좋아서 회화과를 생각했었고, 그 시절 타미 힐피거의 "the cut 더 컷"(2005년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꿈을 키웠어서, 패션과 연출이 어우러진 VMD에 관심이 많았다. 회화과 나와도 백화점에 VMD를 할 수 있다고 들어서 회화과를 가려고 했지만 막상 대학교 원서 쓸 당시, 졸업 후의 미래가 불안해졌다. 나는 집안에 가장이니까 소득이 있어야 하는데, 회화과를 나와서 원하는 곳에 취직한 뒤 일정 소득이 발생할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현실적인 방향으로 디자인과를 선택하기로 했고, 연출과 공간을 다루는 실내 디자인과를 제일 가고 싶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실내 디자인과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제품 환경과를 섞어서 지원을 했고, 원하는 곳은 가지 못했지만 산업디자인과 제품 환경 디자인을 전공으로 하여 대학교를 가게 됐다.
학부 시절에 배운 제품 디자인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실에 가까운 디자인이라기보다, 미래 지향적이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건 좋았지만, 당장 실물화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아이디어들이 많았고, 기술적인 영역은 개인이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라 그 당시에 매력을 많이 못 느꼈다. 나는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원해서 였을까. 당장 눈앞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로바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각 디자인 수업에 흥미를 가졌다. 그중에서도 영상은 눈앞에 놓인 영상물을 통해 우리가 느끼게 되는 생각들. 만드는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작업물, 그리고 힘든 작업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의 뿌듯함이 좋았다. 과 동아리로 모션 그래픽을 배웠고, 그때 만든 작업물로 졸업 이후에 제품 디자인 관련 일이 아닌 영상 관련된 회사로 첫 회사 취직을 하게 되었다.
영상 디자인의 경험치가 적은 편이라 생각했고 취직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5명 정도의 직원이 있는 홍대의 한 영상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회사의 포폴이 괜찮았고, 우선 서울에서 일을 시작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상경했었다. 우리 집이 그리 여유로운 집이 아니라서 첫 시작은 신촌과 홍대의 사이쯤, 김진환 제과점 근처 뒷골목의 고시원에서 첫 서울 생활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저 서울에서 살면서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서 내가 사는 곳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야근보다 중요한 건 존중
내가 다닌 첫 회사는 뉴스 및 방송 로고 등 TV에 나오는 모션 그래픽이나, 기업 영상 및 유명 설치미술 작가의 작품 영상을 전담으로 편집하고 제작하고 있었다. 분명 작업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일이었지만, 영상 회사의 많은 곳이 아마 그럴듯한데, 이곳도 어김없이 지독한 야근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11시 30분쯤 지하철 막차시간이 첫 퇴근 시간인 건 기본이고, 회사에 2층 침대가 있어서 밤새우고 거기서 잠들기 일쑤였다. 회사가 합정이라 퇴근 후 집까지 걸어가는데 새벽 2-3시쯤 나는 야근에 찌는 몰골로 홍대 거리를 지나갔지만 그 시간의 홍대는 한 껏 꾸민 뒤 술 먹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실 여기까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경험이 없으니 이 정도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유일하게 있었던 사수 언니가 항상 안으로 들어간 어깨에 늘 대표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항상 대표님한테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회사에 계속 있으면 나도 저렇게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할까? 그리고 매일 새벽같이 퇴근하고 다음날 돌아오는건 작업물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같이 일하시던 분들의 달력은 항상 퇴사 날짜를 세고 있었고, 나가려고 준비 중인 사람이 90%인 이 회사에서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첫 출근 날 그리고 퇴사 날, 딱 2번 정시 퇴근 이외에 정시에 퇴근해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이렇게 까지 야근하고 일하면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일할만큼 내가 이 일을 평생 하고 싶은 일인 걸까?" 그렇게 고민하다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3개월 수습을 끝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도망친 것도 있지만, 후회는 안 한다.
고민은 시기만 늦출 뿐,
하고 싶을 때 해보자
그렇게 그만두고 나서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영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고, 그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10평도 안 되는 작은 고시원 방 안에서 거의 우울증 올 거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무튼 계획 없이 그만둬 버렸으니 어쩌면 좋을까. 암담한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고민했다. 그러다 든 생각이 내가 애초에 가고 싶었던 실내 디자인과를, 언젠가는 대학원으로 라도 가서 배워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를 앞당기면 어떨까? 나중에 말고 지금 가면 안되나? 라는 생각했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가 있지만, 차라리 조금이라도 어릴 때 부모님께 손 빌리자 싶었다. 철저히 내 욕심으로 결정된 대학원 행. 도피라면 도피, 배우고 싶었던걸 배우러 가자 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정도였나. 9월에 입학을 하기 위해, 부모님 몰래 준비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책 없었던 것 같은데, 혼자 고시원 방에서 서류 준비하고, 면접도 보면서 대학원 준비를 했고, 다행히도 한 번에 붙었다. 대학원 신청하면 다 붙는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테크노 디자인 대학원의 후기는 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반 대학원보다 학점도 더 많이 들어야 하고, 무튼, 입학서류를 다 준비하고 나서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사실 통보나 다름없었다. 나 가겠으니 보내달라.라는 철없는 딸의 투정. 처럼 보였을 거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이제 성인이 됐으면 부모님에게 돈을 더 보태도 모자란데, 돈을 더 들여서 대학원을 가겠다고 하니, 반대가 심하셨다.
하지만 실내 디자인을 꼭 배우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학교를 붙은 마당에 굽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진심 어린 편지를 엄마에게 보내드리니, 사실 부모이기는 자식 어디 있겠냐며 결국엔 가라고 허락하셨고, 힘들게 들어간 만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가면서 고시원을 벗어나게 되었고, 운 좋게 입학 전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도 하고,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학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다니는 2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했다. 3학기에도 조교를 하거나 연구소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최대한 적게 내면서 원하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원하던 공부를 하러 가서 일까. 그 2년이 대학교 4년처럼 느껴지게, 짧다면 짧은 2년 동안 정말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나름 정말 알차게 학교 생활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은 일대로, 수업은 수업대로, 그래서 솔직히 대학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들 이 진로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모두 열심히 사는 사람들 이었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첫 상해와의 인연
여기 대학원에서 나의 중국과 첫 번째 인연이 생긴다. 같은 랩실에 중국인 오빠가 한 명 들어오게 되는데, 교수님이 지정해줘서 얼떨결에 그 오빠랑 같은 팀이 돼서 논문을 쓰거나, 작업을 하게 됐다. 그러다 지도 교수님이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에서 중국을 타깃으로 한 가구 디자인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가 2012년이었나, 다 같이 상해를 방문해서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는 어떠한지 살펴보고, 생활패턴을 분석한 뒤 사용자에 따라 가구 디자인을 하는 프로젝트였었다. 이때 상해에 처음 방문하게 됐었는데 생각했던 중국 이미지가 다르게 느끼게 되는 경험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을 참고해서 졸업 논문도 상해 아파트에 대한 비교 분석을 쓰게 됐고 상해는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자. 대학원을 졸업했으니 이제 실내디자인을 하는 건가? 싶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지도 교수로 모셨던 분은 설계 베이스라기보다는 전시, 공간 기획, 가구 디자인 분야 전문 이셔서, 주로 연구실에서 제안서 작업을 하거나 앞단에 기획 부분 등 설계 이외의 다양한 업무를 하다 보니, 막상 졸업하고 나서 어디로 취업할지 막막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가자니 나는 캐드를 능숙하게 칠 정도의 실력이 못되고, 그렇다고 실내디자인 포폴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선뜻 인테리어 회사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거 해서 배우는 건 좋았지만 막상 현실적으로 취직을 어디로 해야 할지 방향을 잃었다.
우선은 현재 조건에서 갈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졸업 후 취직한 곳은 가구 디자인 회사였는데, 내가 주로 하는 업무는 제품 마케팅에 관련된 시각 작업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 회사도 소규모였고, 다양한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가구 디자인 제안이나 제작도 참여해 볼 수 있었고, 쇼룸 운영도 함께 병행하는 일. 하지만 이 회사도 녹록지 않더라. 가구가 팔려야 수익이 생기고 직원에게 월급도 줄 수 있는데 수익이 좀처럼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구는 자주 구매하는 소비 품목도 아니었고, 이 회사의 가구에 대해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소비할 만한 메리트가 뭐가 있을까. 상품의 경쟁력은 뭘까. 고민하면서 함께 키워나가 보자라는 마음으로 했지만, 밀려가는 월급. 대표와 전 퇴사 직원들과의 소송 분쟁들을 보고 있자니 회사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최고 정점은, 다른 직원들은 다 외부로 나가고 사무실에 혼자 있는데, 무슨 망치 같은 도구 하나 들고 어떤 남성분이 찾아와서는 대표님을 찾는데 꽤나 위협적이었다. 급기야 빨간딱지를 붙이는 광경까지 발견했다. 이런 거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일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로 보게 되다니, 아무래도 대표가 금전적으로 체납된 부분이나 문제들이 쌓였던 게 터졌고 그 시기가 하필 내가 다녔던 게 아닐까. 싶다. 계속 지체되는 급여에 더 이상 다니기 힘들 것 같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못 받은 급여가 있었는데 이후에 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렇게 그만 나가게 되었던 회사.(그래도 끝끝내 받아냈다) 많지 않지만 작은 회사들의 문제들을 경험하면서 과연 회사를 꼭 다녀야 하는 것일까?회사에 의존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회사가 잘될 수도 있지만 무너질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회사라는 타이틀이 사라지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것 같다.
회사보다 중요한 건 '나'
개인의 능력이 우선이다
결국에는, 아. 이제 회사 가지 말자. 라는 결론을 내렸고, 회사가 내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아. 라는 생각이 짙어졌다.스스로 살아나갈 방향을 찾자! 라고 생각하고, 우선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선언했다. 뭐든 할 수 있는 건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우선은 월세를 내야 하니 고정적인 수입은 있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는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생각했다. 이때가 2016년이었나. 그렇게 주변에 디자인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고, 돈을 적게 받더라도 필요한 사람은 도와주면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프리로 일한다는 걸 알렸더니 대학원 때 선배가 일을 소개해줬다. 세운상가에 있던 한 전시 업체였는데, 전시에 들어가는 내부 그래픽 작업을 하는 일 이었다. 매번 색다른 주제의 과학 전시여서, 우주에 대해 알게되거나, 곤충에 대해 공부하면서 작업을 해 나갔는데, 늘 새로운 주제들과 공부해야할 요소들이 있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업체랑 인연이 되어 주기적으로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기도 했었고, 나를 찾아주니 감사하다는 마음에 최대한 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나의 경험치에서 바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은 그래픽이라서, 그래픽 위주의 다양한 일을 하며 지냈다. 어플에 들어가는 디자인 일을 해보기도 하고, 당장에 주어진 일은 하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내가 어떤 능력을 키워 살아가야 하나".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까?" 라는 고민을 계속했었고,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끝에는 '브랜딩'이 있었다.
20대 후반에 찾은 '브랜딩'이라는 방항성
여기에 생략된 내용도 많겠지만, 나는 주변 브랜드에 늘 관심을 가졌다. 친분이 닿은 브랜드는 그 브랜드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을 즐겼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도와주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영상, 제품, 실내, 그래픽 디자인의 경험을 거쳐가면서 브랜드를 만들면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브랜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관련 브랜딩에 대한 그리고 브랜드 디자이너의 길을 가려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다시 고민이 시작됐지만, 그래도 방향성만큼은 뚜렷해졌다. 방황의 시간도 많았고, 여러 경험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이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 만으로 나에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어떻게 브랜드 관련된 일로 경력을 쌓을까 고민하던 찰나. 대학원 때 동갑내기 친구의 연락이 왔다.
우연히 닿은 화장품 브랜딩이라는 기회,
그리고 상해 프로젝트
화장품 브랜드 일이라는데 관심 있냐고, 바로 소개를 받아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여의도 빌딩의 1층 곤트란 쉐리에에서 이사님과 첫 만남이 있었다. 강한 첫인상의 이사님. 그 분과의 인연이 닿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작업에 찌들어 멀끔하지 못한 상태의 나였지만, 그간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시간을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았다. 말씀해주시길 화장품 브랜딩 일이고, 상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라고 하셨다, 화장품이라 경험해 보지 못한 분야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라 재밌게 들렸다. 화장품 브랜드 만드는 일은 브랜드의 꽃! 아닌가! 내가 원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 화장품을 즐겨 사거나 열심히 화장하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저 나에겐 일로써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부산에 내려가야 할 수도 있고, 상해에 가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냐고 물으셨는데 전 다 괜찮다고, 오히려 너무 좋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의 나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서울 생활도 고집할 이유가 없었고, 브랜드 디자인에 대해서 경험할 수 있다면 어디든 경험하러 가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화장품 브랜드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로 했고, 2017년 3월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러 상해에 들어왔다. 내 나이 29살, 4월경 부산 해운대에 내려가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좋은 기회가 닿아서, 상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고, 원했던 브랜딩이라 더욱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20대의 마지막이었다.
구체적으로 상해에 들어와서 일하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해야겠다.
이 이야기도 아마 그리 짧지만은 않을 거라서 다음 편에 계속해 보기로..
ps.
길다면 긴 글이지만, 지난날의 나는 어땠는지, 글을 써보면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확실한 건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원하는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도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여기서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