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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uhapark Nov 10. 2021

다사다난 상해 적응기

터닝포인트가 됐던 두 프로젝트



     사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상세하게 기록해두지 않았더니 기억의 조각조각만 남아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 중, 몇몇 인상에 짙게 남은 이야기들만 글로 남겨야 할 것 같다.


    나는 중국에 들어와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사님과 친구가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중간 매개체가 되어, 필요한 작업 및 이곳의 소식을 전하며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나는 내부 사람 이라기보다 외부 사람이라는 인식이 좀 강했던 것 같다. 나조차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돌아갈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는지 이곳의 프로세스나 크게 알려 주는 것도 없었고, 필요하면 스스로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오기 전 몇몇 알게 된 친구, 동료들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우리 팀 중국인 친구 2명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 들어와서 주요하게 해야 할 업무는 생산을 위한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전에 이렇게 큰 업체의 대량 제품을 생산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화장품인 데다가 중국에서 작업하는 상황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면서 해야 했다. 게다가 업체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니, 하나만 잘못되더라도 그 리스크가 얼마나 클지 상상도 안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중국어로 된 제품들이고 이 당시만 해도 읽을 수 있는 게 없는 상태라, 단어 하나하나 중간에서 한국어 하는 동료들이 체크하고, 단상자에 중문 설명이 들어가는 부분도, 어느 문단에서 글을 끊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담당한 친구가 꽤 많이 고생했다. 거의 매일! 매일! 나와 담당자인 동료는 수정하고 체크하고, 수정하고 체크하고, 밤 10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 당시에 수정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고, 나중에 알려주자는 마음에, 바뀔 때마다 일별로 폴더로 저장했는데 그 폴더마저도 몇십 개를 훌쩍 넘는다. 그리고 이후에 그 폴더가 꽤 유용하게 사용됐다. 너무 많은 수정들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상황이었고, 그에 대한 증거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모르는 게 많은 상태다 보니, 부자재를 담당하던 막내 직원 한 명이 미덥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대하며, 매번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나를 대하기 일쑤였다. 나이도 갓 대학교 졸업한 아이였는데 까칠한 성격에 매번 气死我了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길래, 도대체 쟤 뭐라는 거냐고 동료한테 물어봤더니, 짜증 난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나 죽겠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처음 배운 단어는 짜증나 죽겠다 였고, 무튼, 그 친구랑 통역하는 친구랑 셋이서 용기 업체 인쇄 감리를 갔다. 인쇄의 컬러 조절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컬러 문제, 그리고 인쇄 문제들을 디테일하게 발견해 내는 모습을 보더니 그 이후로 태도가 좀 바뀌더라. 그래도 내가 영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나 보다. 그렇게 계속 수정을 거듭하고, 단기간에 속성으로 아주 힘들게 경험해서, 역시 일에서 배우는 게 확실하다 싶었다. 그래도 같이 무언갈 만들어가면서 서로를 인정해주는 부분이 생겼고, 점차 관계들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회사생활도 중요하지만, 타국인 중국에 왔으니까 중국의 도시에 대해 알아보고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주말마다 근교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여기 문화와 생활을 최대한 이해해보고자 다녔는데, 그러다 4월쯤 연휴가 있었는데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무리하게 돌아다녔더니, 발에 문제가 생겼다. 염증인가 싶어서 찜질하면서 쉬면 나아지려나 했는데, 나아지지 않고,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도 방문했는데 별거 아니라는 듯. 약 처방하면서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에 집에서 쉬면 되겠지 했지만, 점점 더 발은 커져가고 걷기 불편한 상태가 되어갔다. 한국이었으면 바로 치료 했을텐데, 중국이었고 누구한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연휴가 지나고 도저히 발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상무님께 보고 드렸는데, 그때의 나의 발은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고, 염증으로 부풀어 오른 것도 모자라 색상조차 보라색으로 변해 가던 상태. 모두가 약간 식겁한 얼굴로 얼른 한국으로 가라고, 나는 빠르게 한국행 비행기를 끊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창원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랑 함께 병원으로 향했고, 의사가 더 늦었으면 발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봉와직염이라는 판단을 받았고,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한국인 돌팔이 의사 이후로 이곳의 중국의 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겼다. 응급실에서 발을 쨌는데 마취도 안 되는 상태라고 바로 칼을 대셨고, 생 살을 찢는 고통을.. 경험했다. 발의 상황이 심각한 상태에 병원에 방문한 거라 항생제 투여하며 2주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도 아파서 온 거니까, 편의를 봐주셨고, 다행히 노트북은 챙겨 왔으니까 병원에서 일은 할 수 있었다. 퇴원 후 바로 상해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쉽게 재발할 수 있는데 재발해도 책임 못 진다는 강한 말씀에 1주 정도 더 내원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보았다. 그렇게 다 회복됐다고 생각 들었을 때 다시 상해행 비행기 표를 샀고, 원래 5월 말에 엄마가 중국에 여행 오기로 한 날짜가 있어서 비행기를 샀었는데 어쩌다 보니 엄마랑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가야 할 곳은 인쇄 공장의 감리 기다렸다는 듯 바로 공장 일정이 잡혔고,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집에 잠시 쉬고 계시라고 하고, 난 공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감리를 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고, 아무래도 발 일부분을 찢은 상태라 오래 걷는 게 힘들었다. 많이 걸으면 덧날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엄마와 첫 상해 여행이었는데, 제대로 여행도 못 시켜드리고 최대한 덜 걷는 동선에서 움직였다. 그래도 좋은 숙소 잡은 덕에 엄마가 좋아해 주셨지, 엄마와의 여행도 잘 마무리하고, 거의 한 달 만에 무사히 회사에 복귀했다. 미련 곰탱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최대한 내 안에서 해결하려는 게 강한 편인데, 그러다 내 건강을 해칠 수 도 있겠다 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낀 경험이었다. 자기 몸 자기가 잘 챙겨한다. 특히 타지에서, 디자인 이야기하다가 다른 길로 샜지만, 중간에 이런 일이 있어서 좀 지체된 상황이 있었고, 한국 다녀온 뒤 약간 동정표가 생긴듯한.. 눈빛들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돌아온 뒤에도 개발과 수정은 계속되었고 거의 1년 정도 그 프로젝트를 대응하면서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게 다 확정된 후 생산된 제품들은 중국 내의 전국 매장의 매대에 깔리게 되었고, 드디어, 출시를 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첫 생산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작업하면서 같이 해온 동료들과 함께 고생해서 그런지 관계도 두터워지고, 그래도 잘 적응하게 된 것 같다. 이후에 계속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과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됐지만, 작업은 내가 했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내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입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나와 친구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 것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우리가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제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다. 

    내가 들어오고 1년 뒤, 친구도 상해에 들어와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이사님과의 계약을 마무리하게 되면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제 이사님과 떨어지고 독립되어 나와 친구 둘이서 함께 하게 되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서로 각자 원하는 이상이 잘 맞았다. 성장 욕구가 둘 다 강한 편이고, 나는 2D, 친구는 3D로 작업하면서 우리만의 브랜드를 준비해보자 라고 생각하면서 틈틈이 아카이브를 만들어 나갔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각자 만들고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 나누면서, 하나씩, 하나씩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친구가 동료가 되는 것은 이런 과정이구나 싶기도 하고, 서로 정말 다른 두 사람이다 보니 맞춰나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문득 기억나는 게 윗 분께서, 우리 둘을 보시면서 자매 같다고, 둘이 항상 잘 지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굳이 잘 맞춰나간 거라고 대답했었다. 티격태격하면서 맞춰 나간 거냐고 하길래 '네'라고 고민 없이 대답했던 기억이, 처음부터 잘 맞는 관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 맞춰나가는 관계였다.대화도 정말 많이 나눴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둘이 독립된 상태가 되면서 큰 프로젝트는 줄어가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방인처럼 시작해서인지 뭔가를 만들어내서 성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잘리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상해에 있는 게 좋기도 하고, 우리 팀의 브랜드도 잘 만들고 싶으니까, 서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계속 준비를 했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만난 다른 동갑내기이자 룸메이트 였던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전마팀으로 고객사를 직접적으로 만나는 업무를 했다. 우리가 이것저것 만들어 둔 것이 있다고 보여주고, 우리 이런 거 하고 싶어 저런 거 하고 싶어라는 말을 종종 했었는데, 이 친구가 광저우 미니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우리 셋이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89 동갑내기끼리 모여, 작업한 프로젝트는 미니소의 디즈니와 콜라보하는 상품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같이 만들어 나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친구의 내용물 기획부터 우리의 디자인까지 전체적으로 작업해서 제공하고, 우리는 13 sku의 제품들을 디자인했다. 그렇게 친구가 광저우에 pt를 했고, 비슷한 시기에 왓슨스에서 남성 브랜드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리뉴얼을 하는데 오비엠처럼 받고 싶다고 제안이 들어왔다. 나와 친구는 여기서 또 진짜 우리의 자유의사대로 마음껏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간의 못 펼친 꿈을 펼치자 라는 마음으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작업한 브랜드도 왓슨스 pt를 하고 나서, 윗선에서도 디자인 좋다는 평가와, 미니소 측 대표도 디자인을 좋아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회사 내에서도 디즈니 캐릭터 콜라보한 것을 보고, IP 상품 콜라보 제품 개발도 가능하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됐던 것 같고, 좋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렇게 우리 팀이 만들어낸 두 작업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으니 그동안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아, 그래도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있겠다."라는 생각과 우리 둘의 작업으로 이렇게 좋게 평가받으니 덩달아 신났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우리는 더 많은 일이 들어오게 되었다. 

미니소에서도 추가로 4배가량 늘어난 양의 54 sku의 디자인을 요청이 다시 들어왔고, 디즈니 공주 시리즈, 미키마우스 시리즈, 알만한 캐릭터는 다 작업해본 것 같다. 너무 많은 양이라 쉽지 않았지만, 계속하다 보니 끝은 오더라. 그렇게 작업 후 보낸 디자인으로 미니소에서는 최종 오더를 내렸고, 우리에게 3백 58만이라는 발주량을 냈다. 우리는 소위 말해 대박을 냈다. 부회장님께서도 대박 냈다며 평가 해주 신 프로젝트였고, 직원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박수 세례를 받았다. 우리 둘의 작업으로 이렇게 좋게 평가받으니 기뻤고, 우리의 작업물도 이곳에서 잘 될 수 있겠다 라는 희망이 생겼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제안하고 같이 준비한 친구들과 합이 잘 맞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후 미니소에서는 자체 디자인 능력이 좋기 때문에 우리의 디자인 제안을 참고해 직접 작업 후 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에서 개발하여, 우리 둘이 제안한 디자인으로 실적을 낸 첫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왓슨스의 다른 브랜드도 비딩에 성공했고, 우리 회사에서 개발을 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작업물이 기존의 제안과 동일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는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 둘이 인정을 받고 일을 하게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터닝 포인트가 됐던 프로젝트 였었다. 




그 이후의 스토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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