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이 묻은 붓을 팔레트에 대고 위로 그어 올린다. 상단에서 잠시 멈춘 뒤, 아래로 꺾어 돌리는 순간 투두둑, 작은 방울들이 튀어 오르며 자국을 남긴다. 위로 솟은 길을 따라 다시 아래로 그어 내리며, 하나의 선을 완성한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바라보듯 애틋하고, 걱정스러운 여운.
그다음엔 왼쪽으로 붓을 밀어내고,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며 선 주위로 타원의 수평선을 만든다. 세상에 첫 발걸음을 내딛듯 조심스럽게, 선의 물기가 수평선으로 스며든다.
이제 붓은 벅찬 창조의 잔향을 이마에서 훔쳐내며,
새하얀 백지로 몸을 들어 올린다.
하루의 첫 붓질을 시작하기 전, 나는 반드시 이 절차를 거친다.
'언제부터 이런 걸 했더라.'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본다. 아마 일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던 나는, 그림 그리는 행위 속에 나만의 작은 의식을 숨겨놓고 싶었다. 변덕스러운 장난인 셈. 그날 완성한 그림이 상을 받고, 액자에 걸리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혹시 내 의식이 행운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이 사소한 행위를 거치지 않고는 캔버스에 물감을 얹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린 이 의식을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붓에 묻은 물감이 캔버스에 진득하게 엉겨붙는다. 볼을 스치는 찬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파란색과, 그 품에 안기며 은근하게 피어나는 황갈색.
난 불안을 싫어한다. 미신을 믿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루틴을 반복해 온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루틴을 지키는 것과 행운의 관계성 같은 건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루틴을 무시했다가 정말로 불운이 찾아오게 된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하면서도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작은 불안이 스며들고 만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흐릿한 감정의 신호마저 고화소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라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는 이어서, '이건 바로 널 설명하는 말이야.'라고 했다. 지금도 그 말엔 이의가 없다. 아주 조그마한 불안 한 방울이라도 마음속 웅덩이에 떨어져 파장을 일으킨다면, 난 그 미약한 물결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조난될 것이다. 그러니, 이 루틴은 불안의 싹을 싹둑 자르는 제단 의식 같은 것이다. 행운의 부적이자, 동시에 내 목을 조이는 징크스. 피곤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면, 맞다. 난 여전히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고리타분한 아날로그 맨이니까. 그리고 통일 지구에서 캔버스에 붓질을 한다는 건 대부분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붓이 스쳐가는 길마다 너울 치는 파도 위로 윤슬을 수놓고, 금을 뿌려놓은 듯 빛을 내는 모래를 쏟아낸다.
미신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내가 반드시 붓을 길이에 맞춰 정렬한다거나, 물감을 번호순으로 나열하는 것, 또는 냉장고 속 캡슐들을 색과 종류별로 정돈하는 것은 미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리정돈에 있어서 집착스럽게 원칙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지 필요할 때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형인 T는 이런 내 모습이 병적이라며, 마음을 비우는 명상을 하라느니, 심리치료를 받아보라느니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난 그런 말을 들을 때야말로 명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리정돈은 아카데미 첫 수업부터 강조하던 기본 중 기본이었다. 첫 담임 P 교수는 말했다. "주변 환경을 통제해야 화가 내면의 실력이 온전히 발현된다." 테크닉을 갈고닦는 것만큼, 같은 환경을 유지하여 변수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난 변수를 혐오한다. 변수란 세상의 불합리이며, 마땅히 결과를 손에 넣어야 하는 자들의 노력을 강탈하여 무자격자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다. 변수로 인해 손해를 겪는 것만큼이나, 자격 없는 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정리정돈은 내게 통제이자, 확률을 장악하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수단이다. 단언하겠다. 집착이나 강박이 아니라고.
햇빛을 머금은 모래사장이 내딛는 발을 따스하게 감싸고,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수평선 너머 감청색의 물결이 굼실거리며 다가온다.
바다. 지금은 쉽게 다가갈 수 없지만, 한때는 넘치는 생명력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전쟁 유적 박물관 순례 캠프에 갔을 때, 지중해의 풍경을 묘사한 구시대의 유화를 본 적이 있다. 수려한 붓질 속에는 오래전 막을 내린 어느 화가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 안의 세계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난 한동안 말을 잃은 채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그림 속 푸른 파도가 가슴팍까지 세차게 밀려오는 듯했다.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다. 끔찍한 짝사랑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을까? 분노가 차오를 일이 있었을까? 타인을 혐오하는 감정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후회와 원망이 있었을까?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사파이어를 곱게 녹여놓은 듯 파랗게 빛나는 바다와, 언덕을 타고 생명이 싹트듯이 옹기종기 모인 건물들 사이에서 햇살을 온몸으로 품으며 살다 보면, 그런 감정들은 금세 부끄러워지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세상에 추한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뿜는 분수가 있는 해변 공원. 한 손에 바람개비를 든 아이들이 뛰놀고, 그 위로 검푸른 파도가 밀려든다. 인디고를 너무 많이 섞었나?
아카데미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동경하는 이들이 세웠다. 그들은 재해의 현장에서 삽을 들었고, 폐허를 들어 올려 잊힌 유물을 발굴했다. 구전으로만 명맥을 이어오던 유물들, 이를테면 미술 작품부터 역사책, 어느 스포츠 스타의 유해, 멸종된 곡식의 씨앗까지. 우리가 파괴해 버린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 어느 대부호의 벙커에서 수백 점의 고전 명작을 발견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붓 터치와 대작의 장엄한 존재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디지털 복제물이 절대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만의 아우라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아름답고 따스했던 그때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지금까지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난 미적 감각을 타고났다. 단순한 손재주나 묘사력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색을, 누군가는 구도를 볼 때, 난 그런 요소 너머에 있는, '그것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직관을 느낀다.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본질적 감각으로 포착하고, 모두의 인식 위로 초연하게 아름다운, '궁극적인 미'로 발현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갈망. 장담컨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실로 천부적인 재능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E 구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그런 재능을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난 당황했고, 방황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나의 재능은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씨앗이라 확신했지만, 그것을 향해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틀린 건지, 세상이 틀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심과 불안 속에 공들여 키우지 못한 그 씨앗은 결국 폐허에서 드러난 철근처럼 앙상하고 볼품없이 자라고 말았다.
순례 캠프에서 운명처럼 그 바다를 마주한 날, 나는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아카데미의 설립 이념이 마음을 움직였다. 심장을 파고들던 그림의 힘을, 그 감동을 믿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처럼 보였던 아카데미에 합격하기 위해, E 구역 출신인 나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아카데미는, 나의 이상과는 달랐다.
전쟁이 끝나고, '쉘터'와 거주 구역이 세워지고, '죽지 않는 세상'이 시작되자, 삶에 위협이 사라진 몇몇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꼈다. 전쟁의 유해 속에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의 예술 유산들은 오만한 품격과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싶어 하던 그들에게 좋은 장난감이 되었다. 새로운, 그리고 더 많은 장난감을 원했던 그들이 아카데미의 후원자가 되자 모든 것이 변질되고 말았다.
내가 마주한 아카데미는, 더는 아름다움을 좇는 성지가 아니었다. 그저 후원자의 취향을 따라 도안이나 짜 맞추는 기술자 양성소에 불과했다.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미는 후원자의 미적 수준과 취향이 형성한 '양식'이라는 작은 틀에 구겨 넣어졌으며, 정해진 양식에 대한 획일적인 교육만이 이루어졌다.
아름다웠던 세상을 동경한다고? 웃기는 소리. 좁은 식견으로 그려낸 작은 세상을 아름다움의 본질이라 여기며 자위하는 꼴을 나더러 가만 보고 있으라는 말인가? 결국 아카데미는 나의 작은 나무를 위한 양분이 되어 주기는커녕, 우리에 가둔 채 훼방만 놓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도망치듯 휴학계를 내고, 좁은 방에 갇혀 물감 얼룩과 발버둥을 치며 탈출구를 찾길 몇 년인가. 얼추 실마리가 보이는가 하면 허탕,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하고 고뇌만 거듭하다가, 떠오르는 해에 몸을 다그쳐 붓을 잡아보아도 이미 메말라버린 샘에서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끝없는 갈증의 시간을 견디며, 붓으로 이리저리 모래바닥을 헤집으며 오아시스를 찾으려 애썼지만, 젖은 모래 한 줌 찾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하염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방황 속에서, 이제 난 진정 길을 잃어버렸다.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던 아름답고 푸른 바다를 잃어버렸고,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을 정처 없이 헤맬 뿐이었다. 왜 감각을 되찾아야 하는지도, 그런 재능이 정말로 존재하긴 했는지도 이젠 알 수가 없다. 어릴 적 낮잠에나 꿨던, 너무도 현실 같은 꿈이 아니었을지...
검푸른 파도는 이내 낮은 광장부터 높은 곳의 집까지 한달음에 먹어치워 버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수평선 아래에 굼실거렸다. 바다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만 푸르렀고, 캔버스에는 탁한 하늘과 더러운 바다만이 남았다.
"X발." 붓을 쥔 손을 들어 캔버스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란 말이야."
끈적한 물감이 묻은 붓이 캔버스 한가운데에 꽂히듯 철썩 붙었다. 붓의 원망이 수평선 위로 강하게 튀며 짙은 남색으로 번졌다. 그러나 붓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 알고 있다. 붓은 그것을 쥔 사람을 비출 뿐이라는 걸.
붓은 아슬하게 매달린 채, 발버둥 치듯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비틀린 선 하나를 그어내면서. 우중충한 바다 위에, 거칠게 그어진 선. 마치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벗어나려 애쓰는 듯했다. 이내 붓은 뜨거운 땀방울을 튀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원하는 결말이었을까? 하지만 그 아래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의지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회색빛으로 물든 방 가운데 곧게 선 이젤 하나. 그 곁을 둘러싼 가구와 조명, 무거운 공기, 비좁은 창, 그리고 창밖의 벽. 모두가 고요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듯 밖으로 나섰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