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계의 끝은 겨울

by 꿀꾀배기


푸르른 바다, 넘실거리는 파도, 눈부신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하얀 새. 모든 것이 아름다운 이상의 세계...



백일몽에서 깨어난 나는 E 구역의 인간답게,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오늘 치 할당량을 채웠다. "띡, J, 근무 완료. 일당이 계좌로 지급되었습니다." 주어진 일을 마친 후, 출구의 정산 장치에 스마트 디바이스를 태그 하면 즉시 일당이 입금된다. 그 돈을 모아 한 달 치 보급을 신청하고, 보급받은 캡슐과 에너지바로 삶을 이어간다. 보급을 신청하고 남은 돈은 거주비를 내고 나면 거의 남지 않는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이 삶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통일 지구의 복지 아래에서 당신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세요!'

공장 부지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에서는 통일 지구의 선전 영상이 24시간 흘러나온다. 듣기 싫은 소음일 뿐이다. 순간, 삐─ 하고 이명이 울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오래된 기억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내벽 넝마 더미, 도시 전체를 뒤흔들던 굉음과 진동의 환영을 받으며 태어났고, 기나긴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자란 나는 세상이 원래 그런 줄로만 알았다.

전쟁은 썩은 살을 파먹는 구더기 같았다. 산처럼 쌓여가는 시체더미 아래 꾸물거리며, 결국 세상을 전부 삼켜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생명줄은 주인의 손을 벗어나 이리저리 휘둘렸고, 억겁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길바닥에 버려진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게 파괴된 종말의 세계에서 앞날은 여전히 막막했다. 지쳐버린 사람들은 종전의 감격에 주저앉았으나,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 'S 기업'이라는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빠르게 모양을 바꿔갔다. 매체에서는 하루 종일 '통일 지구 협약 체결', '전쟁 피해 복구', '새로운 시대 개척'에 대해 이야기했고, 언제나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등장해 친절한 미소와 정제된 말투로 새로운 삶을 약속했다. 혼란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은 그 약속을 신앙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아직 어렸고,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말은 아주 기뻤던 것 같다.

나중에야 나는 TV 속 그 여자가 L이며, S 기업의 대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 지구 협약이 체결되었을 땐 모두가 감격에 겨워 울었지. 전 세계가 손을 맞잡고 하나가 되어, 다시는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고. 힘을 합쳐 새 터전을 가꾸어 나가자고. 그건 모두 S 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단다."

학교 수업에서도 그녀와 S 기업에 대한 찬양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줄곧 그 신앙심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돈은 전쟁 중 무기와 화약을 팔아 축적한 것 아닌가요?"

내 질문에 학급 전체가 일제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빛들이었다.

"...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집에서 잠을 자는 것도 S 기업 덕분이란다."

잠시 침묵하던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곤 수업을 이어갔다. 아이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혼자 자리를 정돈하던 내게 선생님이 다가와 말했다.

"원망하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서, 어른들이라고 딱히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었단다..."

그때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쉘터’에 대한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올 때도 그랬다. 'A 구역' 한복판,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머문다는 곳. 기후도, 낮과 밤도 자유롭게 조절되고, 외부로부터 안전하고 격리된 투명한 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고결하며, 지극히 품격 있다고 했다. 게다가 역사책 속의 삶처럼, 곡식과 가축을 길러 에너지바가 아닌 진짜 음식을 먹으며 풍요롭게 살아간다고 했다.

나는 막연히 쉘터라는 곳에 대해 상상해 보곤 했다.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은 쉘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지금의 삶도 충분해.” 혹은, “애초에 그런 곳은 없을지도 몰라.”라며 묵묵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갔다.



이제 세상은 '통일 지구 협약'에 따라 하나로 통합되었다. 지도에서 국경선은 사라졌고, 도시는 알파벳과 숫자로 구분되었다. A, B로 시작하는 구역은 경매로, C, D, E 구역은 남은 사람들에게 배정되었다. 사람들은 생애 전 과정에서 각자의 몫을 수행했다. 정해진 만큼 먹고, 일하고, 웃고, 쉬는 삶. 무질서했던 과거는 잊혔고, 질서와 반복이 새로운 이상처럼 받아들여졌다. 불사 주사를 맞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책임과 역할이 부여된 삶. 사람들은 자신들이 '통일 지구 계획'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차라리, 그 자부심이라도 영원했다면. '섬'으로 귀결되는 종말의 선언 이후, 이곳에 남은 건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빛을 잃은 이들뿐이었다.




공장 구역의 경계를 지나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정돈된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고개를 드는 이 하나 없이, 모두 정해진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그마저도 다섯을 넘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걸까?

어릴 때도 그랬다. 모두가 정해진 음을 정확한 박자에 맞춰 연주하는, 잘 짜인 악보 속에서 나 혼자 박자를 놓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향한 시선 역시 늘 좋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도, 공장 동료들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조화롭지 않은 것'을 경계하게 된 듯했다. 그렇게 나는 부조화스러운, 괴짜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내 눈에는, 좁은 철장에 갇혀 먹이를 받아먹는 그들이야말로 짐승 같고, 부조화스러웠다. 조화로운 것의 기준은 언제부터 정해졌을까? 언제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세상의 틀에 끼워 넣기 시작했을까? 왜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을까? 영원히 진실을 외면할 수 있다면, 거짓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걸까?

세상은 파도치는 해협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몰아치는 파도 위에 몸을 맡길 뿐이다.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어느 파도를 탈 것인가에 대한 다급한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했으니까, 그들은 자신의 서핑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 믿는다.


난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멀뚱히 서있는 이젤을 바라보았다. 내가 던진 붓이 그어놓은 검푸른 선이 바다 한가운데 절규하는 듯했다. 추악한 고통과 절망이, 더러운 색의 바다와 이질감 없이 어우러졌다. 그 선은 영원히 저 바다를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림을 거칠게 집어 들고 다시 방을 나섰다. 마르지 않은 물감이 손가락에 묻어 번졌다.






작년 겨울, N이 떠나던 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다.

하늘은 마치 부끄러운 낙서를 감추려는 듯이, 구겨진 빈 생수 병, 대충 묶이다 만 채 버려진 쓰레기봉투 위로 덕지덕지 수정테이프를 그어댔다. 얼룩덜룩, 더럽게만 느껴졌다. 나는 쓰레기 더미 옆에 그림을 내려놨다. 그림은 가만히 눈을 맞았다.

멀어지는 N을 바라보던 나 역시 그렇게, 홀로 선 채 눈을 맞고 있었다.




N. 작고 연약한 몸으로, 암담한 현실 아래에서 자신만의 따스한 세계를 만들어가던 사람. 그녀의 주위는 언제나 노란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과거를 후회하고, 세상을 비난하기만 하던 나는 그녀를 동경하게 되었다

N은 나의 구원이었다.

그녀는 삶의 방식을 알려주었고, 빛이 되어주었고, 내게 따스한 봄이 되어주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사계절 같았다. 봄처럼 따스하게 다가와, 여름처럼 뜨겁게 사랑했고, 가을의 낯선 서늘함에 서툴렀으며, 겨울의 매서운 눈보라에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라면 현실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던 것 같다. 그녀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시선이 허공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다.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섬'으로 떠나버렸고,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고, 모두 내 탓이었기 때문에.

진실을 마주한 그날, 평소처럼 외면하고 지나쳤더라면. N이 그랬듯이, 내가 그녀의 삶에 따스한 빛이 되어주었더라면. 그럼에도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 보자고, 이기적인 손길이라도 건네보았더라면. 나는 그러나 N을 위해, 후회와 원망을 가만히 눈보라에 감췄다. 차라리 눈이 영원히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스듬히 세워진 그림 위로 어느새 눈이 수북이 쌓였다. 그림을 집어 들고, 눈을 툭툭 털었다. 물감이 묻은 눈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림은 녹은 눈으로 얼룩져 있었다. 조심스레 손끝을 그림 위로 가져가 얼룩을 닦아냈다. 흘러버린 감정의 흔적에 닿는 위로가 되길 바라며.




결국, 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탓이다.

그녀가 떠난 것도, 내가 이렇게 아픈 것도.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낙원과 바다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덮인 길 위에, 외로운 발자국이 삐뚤빼뚤 남겨져 있었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은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그 초라한 발자국마저 서둘러 덮는 눈보라는, 마치 내게 이곳을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골목을 돌아서자 불쾌한 이질감이 엄습했다. 바닥 위, 내 것이 아닌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꼭 누군가를 마주치고 싶었다. 말을 걸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거리를 걷는 나와 같은 누군가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눈이 완전히 덮이지 않은 그 발자국은 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조심스레 방향을 틀어, 그 흔적을 따라 걸었다. 발자국은 작은 무인 편의점 앞을 지나, 초라한 빛이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오른쪽 담벼락에 부딪힐 듯 이어져 있었다.

그 발자국은 이상했다. 흐트러져 있었지만 방향성은 또렷했고, 마치 리듬을 타듯 한쪽 앞꿈치만 두 번씩 번갈아 찍혀 있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발자국인가?' 하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내가 따라가던 발자국이, 맞은편에서 오던 또 다른 발자국과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서 자취가 끊긴 것이다. 작은 몸싸움이라도 있었던 듯, 바닥이 헤집어져 있었다. 작은 발자국은 그곳에서 방향을 틀어 왼쪽 골목으로 다시 이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무언가 무겁고 큰 것을 질질 끌고 간 듯한 넓은 흔적이 길게 남아 있었다.

눈이 쌓인 정도로 보아, 그 자국은 방금 전에 생긴 것이었다. 기껏해야 5분 남짓?

익숙해져 느끼지 못했던, 눈이 사납게 흩날리는 소리가 비로소 청각을 가득 채웠다. 볼을 스치는 눈바람은 머리카락 끝부터 가슴, 하반신을 따라 한기를 밀어 넣었다. 귓속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고개를 흔들었다. 입안에 침이 고인 것이 느껴져, 힘겹게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주변의 정적 속에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저 멀리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의식적으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돌려 회색 건물들이 늘어선 반대쪽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골목 쪽으로 돌렸다. 떨리는 가슴을 달래려 작은 심호흡을 했다.


불현듯, 이 발자국의 끝에서 마주할 것은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어쩐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쥐 몇 마리가 휙 달려 나와 발치를 지나쳤다. 잠시 멈췄던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에 힘이 풀리며 들고 있던 그림이 툭 떨어졌다.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바닥을 덮은 눈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숙한 곳에서, 작고 앙상한 여인이 노동복을 입은 남성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고 있었다. 박힌 칼을 빼는 순간, 선홍빛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핏방울은 거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떨어진 그림 위에 팍- 하고 튀었다.



그 시뻘건 선은 바다를, 검푸르게 얼룩진 그 세계를 무참히 찢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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