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번째 큐

by 꿀꾀배기


"이제,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구원이라 불렸다. 희미한 기억 속, 나는 거실 구석의 작은 TV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 속에는 흰 실험복을 입은 사람들이 작고 반짝이는 주사기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L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면에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어른들은 웃었고, 박수를 쳤으며, 환호했다. 어린 나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싫어했지만, 그날만큼은 순진한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사를 맞으면 슈퍼히어로처럼, 죽지 않고 평생 튼튼하게 살 수 있대."

난 주먹을 불끈 쥔 채, 주삿바늘 앞에서 용기를 냈다. 울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고, 아픔을 참았다. 그 순간이 영웅이 되는 의식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기억은 이제 흐릿하고 오래된 것이 되었고, 세상은 그날 이후의 질서를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죽지 않고, 늙지도 않는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영원할 것 같은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득히 어릴 적, 전쟁의 포화 속에 숨은 채 공포에 떨며 들었던 그 중얼거림을.

"차라리 저게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들은, 죽고 싶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을 내뱉는 이들일수록 처절하게 살고 싶어 했다. 못 살겠으니, 살 수 있게 만들어 달라는 절규였다. 쉽게 입에 담던 말버릇과는 달리, 그들은 막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무척 어려워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했으며, 사실은 그 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의 욕구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하며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존재라고. 대체 식량으로 만든 퍼석한 에너지바 두 개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영양소를 충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신의 갈증은 해소해 주지 못했다.

남보다 더 소유하고 싶고, 소비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닌가? 적어도 나는, 마른 벌레를 씹는 듯한 에너지바 대신 입에서 녹아내리는 고기 요리를 음미하고 싶었고, 밤새 공장 소음이 울리는 어둡고 습한 돼지우리 같은 주거 구역 대신 찬란한 분수와 다채로운 식물이 가득한 정원이 있는 대저택에서, 관리인을 두고 품격 있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도, 대저택도, 푸른 바다도, 그리고 N도. 그래서 나는 늘 불행했다.

죽고 싶었던 내게 주사는 저주였다. 세상의 종말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아야 한다는 형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불행이, 내겐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N과 함께 '섬'으로 떠나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 ─ 끔찍한 살인의 현장 한복판에 선 이 순간 ─ 내 뇌는 ‘저도 그 시체 옆에 눕혀주세요’ 대신 ‘어서 도망쳐’라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두 다리는 이미 공포에 마비되어 그 신호를 받지 못했다. 다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와 살인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살인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직 따뜻한 시신을 계속해서 손질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오래전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과거 사람들이 부드러운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삼키던 장면.

구역질이 났다. 전쟁이 끝난 이후, 칼로 자를 수 없는 신체를 갖기 전에도 살인의 광경을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거친 숨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때, 묘한 향이 스쳐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따뜻하고 짙은, 동시에 날카로운 냄새. 어디서 맡아본 적도 없고,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 향이 내 감각을 휘감았다.

작은 살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놀이를 계속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모래밭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모래성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고.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던 심장은 어느새 숨을 죽였고, 이내 방금 전과는 다른 템포로 다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공포라는 감정은 고통과 연결된 기억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주사를 맞았고, 웬만한 충격은 따끔하지도 않았으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공포로 군림하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신체적 고통도, 죽음도, 내겐 무뎌진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했다. 공포에 무뎌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한편에서 기묘한 설렘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아름다움을 마주한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흥분이 가슴속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새로운 장르의 이상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회색빛으로 가득 찬, 의미도 목적도 찾을 수 없던 삶에서 마주한 핏빛처럼 붉은 세상. 말 그대로 피로 마구 얼룩진 시뻘건 세상. 그건 실로 자극적이었다. 곧 내 눈에 물감처럼 인식되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리라는 캔버스 위에, 의도를 내포하지 않은 채 색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선명한 붉은 물감. 그건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했으며, 그 색을 내뿜는 여자의 주위는 천천히 빨강에서 보라로 번져갔다.


보라색.


전율이 일었다. 내게 색은 언제나 정제되고, 정리되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은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목적 없이, 존재 그 자체로 피어나는 맹렬한 색채. 그것은 단순히 어떤 색이 아니라, 순수한 욕망의 아우라였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칙칙하고 거무튀튀한 골목은, 작은 예술가에 의해 하나의 걸작이 되었다. 더, 더 가까이 마주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쩍도 않던 다리가 자연스레 앞으로 움직였다. 시뻘건 캔버스를 밟으며, 천천히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머릿속에 무수한 말들이 요동쳤고, 그중 가장 어리석고 가장 솔직한 것을 꺼내놓았다.

“어떻게 한 거예요?”

불안정한 호흡 때문에 목소리는 떨렸다. 살해 현장의 목격자가, 살인자에게 던지기엔 조금 부조화스러운, '괴짜'같은 질문이었다. 작은 살인자의 가벼운 단발머리가 찰랑이며 움직였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칼을 든 손등으로 코밑을 쓱 훔치고는, 다시 시체에 칼을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뭘?”

“사람을 칼로 잘랐잖아요. 어떻게 한 거예요?”

이번엔 조금 더 명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무심히 시체에 별을 그리다가, 박혀 있는 칼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오밀조밀한 얼굴. 창백한 뺨 위엔 선명한 붉은 얼룩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어쩌면 감탄하는 듯한 눈을 처음 봤다는 듯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게 궁금해?”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낮고 깊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번에는 최선의 말을 골라내려 애썼지만, 마땅한 선택지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호랑이를 만난 강아지처럼 덜덜 떨더니, 갑자기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와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내가 어떻게 비쳤을까? 다만 그녀는 그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알아차린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체에 박힌 붓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기꺼이 그녀의 다음 획을 그었다. 굳이,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동작으로.

그곳에는 진한 보라색이 피어올랐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E 구역, 그중에서도 가장 볼품없는 변두리,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캄캄하고 차가운 골목 깊은 곳─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무대 위에서,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연극은 그렇게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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