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저 눈이 잠시 마주쳤을 뿐인데. 강도? 나 같은 노동자 나부랭이한테서 뭘 얼마나 뜯어내겠다고. 허벅지에 바늘이 박히는 순간, 뜨겁고 끈적한 무언가가 퍼지며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괴한은 미역줄기처럼 축 늘어진 내 몸을 질질 끌어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너무 두렵다. 미친 듯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 이 골목을 지나가지 말 걸, 애초에 야간 근무를 하지 말고 오늘은 좀 쉴걸. 춥다. 질질 끌려가는 하체 아래로 눈이 스며든다. 축축하고, 차갑다. 그는 나를 짐짝처럼 골목 구석에 내던졌다.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입도 열리지 않는다. 움직이고 싶은데, 팔다리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칼끝이 내 피부를 천천히 가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이 살가죽을 헤치고,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내 가슴을 타고 내려와 내장을 마구 들쑤셨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통증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는 기뻐 보였다.
그는 겁먹은 것 같았다.
그는 나였다.
나는 손에 쥔 칼을 저 멀리 던지고 도망쳤다. 가능한 한 빨리 달리려 했지만,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무언가에 묶인 듯 무거웠다. 마치 누워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에서 무언가 다가왔다. 멀리 도망쳐야 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려 했지만,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내 등 뒤에 도달하더니,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귀 옆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내게 속삭였다...
“확인하지 않은 알림이 있습니다.”
기계음이 울리는 순간, 눈꺼풀이 덜컥 열렸다. 짧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칙칙한 회색 천장이 시야를 채웠다. 내 방이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이불을 발로 밀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팔다리는 힘없이 축 늘어졌다. 비틀거리며 냉장고로 가서 색색이 정돈된 캡슐들 사이에서 수분 캡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자 바싹 말랐던 입 안이 금세 촉촉해졌다. 타는 듯한 갈증이 가시는 걸 느끼며 테이블로 향했다.
“확인하지 않은 알림이 있습니다.”
하얀 플라스틱 원형 테이블 위 스마트 디바이스가 푸른빛을 부드럽게 퍼뜨렸다. 디바이스를 집어 들었다. 오후 12시 31분. '주간 작업은 글렀군.' 하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텅 비어있기 마련인 알림 창이 가득 차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대개 연락 자체가 오지 않거나, 와도 곧장 확인했기에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알림 창을 확인하고 외마디 탄식을 뱉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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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구역과 비거주 구역의 경계 어딘가. 네모 반듯한 회색빛 건물. 건물 전면엔 'E-1300 구역 외곽 순찰대'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안에는 주인 없는 책상이 줄지어 있었고, 가장 안쪽 책상에는 제복 단추를 배까지 풀어헤친 뚱뚱한 중년 남성이 코를 골고 있었다. 한쪽 벽의 결산 장치 앞에는 빳빳한 하늘색 제복에 넥타이까지 꽉 조여맨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엔 스마트 디바이스 두 개가 들려 있었다. 57...58...59... 12시 정각이 되자, 장치에서 녹음된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즉시 디바이스를 차례로 태그 했다.
"삐, K 서장. 삐, T 순경. 근무자 전원 확인되었습니다. 점심시간입니다. 정오 라디오 방송을 재생합니다."
중년 남성 K가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에게 다가간 젊은 남자는 디바이스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장님, 점심시간입니다. 저는 보고 드린 대로 동생이랑 약속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음? 음... 그랬지. 천천히 다녀와." K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T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빠르게 건물을 나섰다.
"동생 참 지극하게 챙기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그 사이로 라디오 방송이 흐리게 흘러나왔다.
"-... 늘도 안락사 섬 병원의 대기열이 조기 마감되었습니다. 신청자 분들께선 빠른 접수를 권장드립니다. 오늘도 통일 지구에서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건물을 나선 T가 차에 오를 때까지도 그의 디바이스에는 연결음만이 울려 퍼졌다.
"얘는 또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그가 찾는 동생, J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꿈틀거리고 있었다. T와 J는 애틋한 형제라 하기엔 거리가 있었다. 대부분의 소통은 T에서 J로 향하는 일방통행이었다. 가끔 T가 점심을 권하면 J는 마지못해 응하고, 만나면 대체로 시시한 근황만 나누고 헤어지는 사이.
하지만 T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죽지 않는 세상이 되기 1년 전, 전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고, 어머니와 J를 위해 그는 스스로가 아버지를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T는 느꼈다. J의 눈은 항상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닿지 못하는 어딘가, 찬란한 이상을 향해서. 그래서 현실에 비관적이고, 그래서 우울할 수밖에 없는 아이. T는 그런 동생을 공장 노동자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
적성 검사에서 나온 경찰이라는 직업은 그의 정의로운 성격과도 맞았지만, 노력하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목표로 제격이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땀을 흘려가며 준비했다. 수석으로 경찰시험에 합격해 C 구역에 배치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노력이 조만간 보상받을 거라 믿었다. J도 아카데미에 합격하며, 그가 그리는 밝은 미래가 머지않아 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AI 경찰 법안이 통과되고, 인간 경찰 대부분이 자리를 잃었다. 결국 공장으로 떠밀려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T는 끝까지 경찰직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E 구역 변두리 순찰대로 좌천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신념을 지키면,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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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긴, 집이지. 미안. 늦잠 잤어.” 나는 코로 짧게 숨을 내쉬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디바이스 너머 형이 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했잖아! 어제 뭘 했길래 지금까지 잠을 자? 지금 너네 집 거의 다 와간다.”
“야간 돌았다. 그 '섬'도 한 바퀴 둘러보고 오지 그랬냐.”
“이 새끼는 말을…”
형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녀가 떠난 곳.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곳. '섬'은, 우리에게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형은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간도 없고, 간단한 거라도 사들고 갈 테니까 기다려.”
“나는 에너지바 하나면 되는데.”
“어, 안 그래도 네 거는 그걸로 살 거다.”
연결이 끊겼다. 머리카락을 헝클며 일어섰다. 화장실로 가서, 세안제가 녹아든 뜨거운 김이 천천히 올라오는 세면대로 향한 후 얼굴을 비비듯 대충 씻어냈다. 수증기는 뜨거웠지만 감각은 여전히 둔했다. 정신을 붙들어보려 애썼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세수를 마치고 나서, 다시 침대로 돌아와 풀썩 몸을 던졌다. 가만히 벽을 바라보는 동안 어제의 장면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발자국, 골목, 시체, 그리고 살인자.
인상착의는 흐릿했다. 단발머리, 피 칠갑을 한 옷, 그리고... 선명한 보라색.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저릿해졌고, 눈앞이 아찔하게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감각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려 애썼지만, 장면은 뚝뚝 끊겨 있었다. 집에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왜 살인자는 나를 살려뒀는지. 시체는 어떻게 됐는지. 그리고, 살인자는 어디로 갔는지. 무엇 하나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머리만 점점 더 지끈거렸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낮고 반복적인 전자음이 침묵을 갈랐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증오로 가득 찬 눈의 형이 구겨진 회갈색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우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형이 가져온 봉지를 뒤집자, 내용물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벌레를 갈아 만든 빵과 배양육 햄을 끼운 샌드위치 두 개, 그리고 딸기 맛 에너지바 하나. 말없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샌드위치도 하나 먹어.”
나는 대꾸 없이 남은 샌드위치를 집었다. 둘은 정적 속에 각자의 샌드위치를 씹었다. 침묵을 깬 건 형이었다. “몸도 비실비실한 놈이 왜 야간을 돌아.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나는 입속의 내용물을 삼킨 다음 대답했다. “주간 작업 자리가 안 나니까 그렇지. 이참에 그냥 생활 패턴 자체를 야간 형으로 바꿀까 봐.”
형은 테이블에 떨어진 햄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사람도 없는데 자리가 왜 안 나? 나 여기 오면서 사람 그림자도 못 봤다.”
“자동화 공정이 늘어나더니, 이젠 배정 업무 목록에 찌꺼기 같은 잡일 뿐이야. 그마저도 가뭄에 콩 나듯 하고." 나는 말끝에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햄 조각과 소스가 테이블에 조금 떨어졌다. 나는 조용히 휴지를 한 장 뽑아 그것을 닦고, 구겨서 봉지에 집어넣었다.
“지금이라도 공장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하지 그래.” 형의 말투에는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인데.”
형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길래 내가 먼저 막아섰다.
“또 생계 걱정 말고 예술에 전념해 보라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제발 그냥 가라. 난 죽어도 형한테 손 벌릴 생각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
“전에도 말했지. N 일은 형이 도왔든 말든 똑같았을 거라고. 형한테 책임 같은 거 아무도 묻지 않으니까 나한테 신경 좀 꺼줘. 형한테 빌어먹고 사는 게 더 불행해.”
형은 더 말하려다 말고, 눈을 질끈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뭐야, 이게?”
“펼쳐 봐.”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쳤다. 공모전 포스터였다. 난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림 그릴 생각 없다고.”
“개최자가 누군지 봐. R 그룹의 회장 H야. 아버지인 전 회장이 갑자기 죽고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됐지. 뉴스에서 봤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지 않아서 세간에 난리도 아니었는데.”
“내가 지난달까지 앉아 있던 공장 자리에 지금 R사 자동 공정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건 잘 알지.”
내가 말했다. 비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H는 별종이야. 양말 하나까지 자기 취향에 맞춰야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발광한다더라.”
“그런 애들 많지. 걔들 세상은 원래 그래. 알잖아? E 구역에 사는 나 같은 놈의 작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형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H는 다르다고. 여간 미친놈이 아닌지,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든다며 온갖 트집을 잡아서 고용인들이 다 달아났다나. 그래서 이 공모전을 연거야. 누구든 자기 눈에 드는 작품 하나 들고 오면 뭐든 해줄 놈이래, 진짜로. 작은 거라도 좋으니까 꼭 하나 갖다 내 봐.”
나는 여전히 못 미더운 기색으로 포스터를 들여다봤다. '주제 자유, 분야 자유, 수량 자유, 크기 자유, 기간 미정.' 뭐 이런 공모전이 다 있지, 하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언제든 내 마음에 드는 거 가져와 봐라'라는 뜻이었다.
“난 복귀해야 해서 이만 간다. 잘 생각해 봐!”
형은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입에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으로 짧게 인사를 건넨 뒤, 나는 다시 포스터를 훑어봤다. 형은 문을 나서며 그런 나를 한 번 더 돌아봤고,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난 형이 매번 집으로 찾아오는 이유를 알고 있다. 꼭 물감의 양이 줄었는지 몰래 확인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형도 안다. 아마 다음 주도 안부를 물어올 것이다. 참 속이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나는 계속해서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읽었다,라고 하기엔 그 공간에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던 쪽에 가까웠다. 사실, 형이 이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오늘 붓을 잡을 생각이었다. 어제의 황홀했던 감각, 그 고고한 보라색의 자태. 그걸 다시 마주하고 싶었다. 형이 사 온 딸기 맛 에너지바를 일부러 남겨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구석에 엎어져 있던 캔버스를 세워 이젤에 걸었다. 물감 통과 팔레트를 꺼내고, 신중하게 물감을 고르고 짜냈다. 숨을 들이쉬고, 팔레트에 붓을 가져갔다.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중앙으로 돌아와서, 왼쪽으로 밀어낸 다음,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묘한 색이 묻은 붓이 캔버스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밤은 깊어지고, 달은 중천에 떠올랐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붓이 멈춘 건 새벽 2시 34분. 디바이스로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침대에 집어던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세 개의 붓, 캔버스엔 추악한 색의 물감들이 가득 뒤섞여 있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었다. 마른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캔버스를 찢어 부수고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하루를 전부 쏟아부었지만,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캔버스 위의 물감은 마치 겁에 질린 눈동자 같았다. 두려움, 죄책감, 결핍과 상처, 억눌린 욕구와 눈먼 감정들. 숨기고 싶었던 내 자화상 그 자체였다.
이따위 것을 그려내고자 했던 게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구석에서 몇 년간 처박혀 있던 스케치북을 꺼냈다. 외투를 걸치고, 주머니에 연필 몇 자루를 집어넣었다. 조급한 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순수한 보라. 원초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맑고 아름다운 그 색. 모든 실마리가 거기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