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들꽃

by 꿀꾀배기

(챕터)는 과거의 이야기.

동복을 정리하기엔 이른, 바람 끝이 여전히 매서운 날씨. 그럼에도 새 생명들이 움츠린 어깨를 펴고 어렴풋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이른 봄의 일이었다.

자연스레 눈을 뜬 나는, 평소와 다른 개운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아직 차갑지만 부드러운 공기가 청아하게 가슴속을 채워왔다. 가벼운 몸을 이끌고 냉장고 앞에 섰다. 평소보다 상쾌한 기분에 몸을 조금씩 흔들며 냉장고 안을 보다, 습관처럼 수분 캡슐 하나를 꺼냈다. 캡슐을 입에 넣으려다가, 그것을 다시 자리에 돌려놓았다. "기분이다." 나는 대신 그 옆에 반쯤 남은 물통을 들었다. 그것은 오늘처럼 몸이 가벼웠던 저번 주 화요일, 주간, 야간 타임을 연달아 일하고 돌아오던 길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수분 캡슐은 입에 물고 있으면 갈증을 해소해 주고, 하루에 필요한 수분을 천천히 보충해 준다. 게다가 에너지바 하나 값이면 열 개를 살 수 있을 만큼 저렴하다. 반면 500ml짜리 생수 한 병은 에너지바 열두 개만큼의 가격이 붙는다. 평소 같으면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을 선택이었다.

목을 조금 축였을 뿐인데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졌고, 기겁하며 냉장고 안에 그 물통을 고이 모셔놨던 나는 오늘 그것을 다시 꺼내 들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남은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혀를 타고 목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수분 캡슐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한 만족감에, 묘한 감동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곧 다시 갈증이 밀려올 것을 알았다. 그런 면에서 이건 사실상 잠깐의 쾌감을 위한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쾌감이 하루를 조금 더 생기 있게 만들어 준다면, 그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며 그날의 나를 다독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면, 충동구매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책망했을 것이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 물병을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망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 만물과 순간의 경험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도 이제는 불안이나 두려움보다는 어딘가 낙관적인 무언가를 그려보고 있었다. 그 변화가 N 때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을 때, 언제나 미소를 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웃음을 줄 만한 무언가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던 내게, 그런 그녀는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특별히 비싼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매일 색이 다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오늘은, 노란 머리끈을 묶은 내가 궁금했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가벼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끈의 색이 바뀐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창고를 정리할 때도, 납품 자재를 분류할 때도, 업무를 마치고 뒷정리를 할 때까지도─ 그 말의 뜻을,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거대한 벽 너머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바라보았다. '쉘터'의 사람들이 웃으며 농작물을 수확하고, 산들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풀밭에 누워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도 누릴 수 있습니다. S 기업은 쉘터의 확장을 위해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쉘터는 처음 완공된 그날 이후 단 1센티미터도 확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넓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었다. 언젠가는 이 땅도 쉘터의 품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같을 발걸음을 조용히 내디뎠다. 어쩌면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라는 건 결국 좌절과 패배감, 그리고 열등감을 남길 뿐이었다. 그 끝엔 언제나 초라한 스스로에 대한 자각만이 남을 테니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향한 그곳, 벽 아래에 N이 있었다. 그녀는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벽과 바닥의 틈새에서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녀는 그 작고 여린 꽃을 바라보며,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 것처럼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다, 숨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람이, 이토록 아름답게 웃을 수 있다니.



그제야 그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스스로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창한 결과가 아닌, 사소한 순간에서. 바깥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길어 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말하자면 '차선의 이상'이었다. 그건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작고 환한 것이 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메마른 마음속 풀밭 위에, 보드랍고 따뜻한 노란 들꽃 한 송이가 살며시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살아내는 방식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내 내면의 방파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그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똑같은 칙칙한 노동복을 입고 있는데, 왜 그녀는 저토록 빛이 나는 걸까?

N은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주위를 감싸며 물드는 따스한 노란빛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주한 현실 안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일이 아닐까? 내가 좇던 이상은 언제나 너무 멀었다.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만 보며 불행 속에 잠겨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과연 이상적일 수 있을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방식은, 적어도 지금 내 것보다는 분명 더 이상적이었다.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인 하루를 반복하는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N은 자꾸만 자신을 훔쳐보는 나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속이 쉽게 드러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보다. N은 내가, 무채색의 사람들 속에 홀로 칠해진 푸른색이라 말했다. 자신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던히도 덧칠을 해봤지만, 결국 어떤 색도 되지 못한 채 탁해진 짙은 푸른색.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텐데.' 그녀는 아쉬워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내가 궁금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렸다. 내가 먼저 다가오려는 순간을, 스스로 용기를 내려는 마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딸기 맛 에너지바를 손에 쥔 채, 조금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민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점심시간엔 마주 앉아 에너지바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퇴근길엔 새로 발견한 당 캡슐이나 껌을 나눠 먹으며 함께 걸었다. 발을 맞추며 걷는 그 평범한 순간들은, 서로가 있었기에 찬란하게 빛났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탁해졌다고 믿었던 나의 푸른색은, 그녀에게 물들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를 이해했을 때, 조심스럽게 피어났던 들꽃 한 송이.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피어난 그 한 송이 주위로, 내 풀밭에 봄이 번져가고 있었다. 노란 들꽃이 조용히 들판을 뒤덮듯이, 내 마음도 천천히, 그리고 깊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꽃은 어디서든 피어나. 따뜻하고 포근한 곳에서도, 춥고 막막한 곳에서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피어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 꽃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꽃과 눈을 맞출 수 있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연민이든, 동경이든, 동질감이든, 희망이든. 각자의 세계에 서로의 존재를 깊이 새겼다. 그리고 서로의 세계에 기꺼이 발을 디뎠다.

볼 수 있을 때는 언제나 서로를 바라봤다. 보이지 않을 때는 늘 서로를 찾았다. 다시 마주했을 때는, 잊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 함께 웃으며, 순간의 행복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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