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설 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금방 그녀를 찾게 될 거라 믿었다. 한 시간 가까이 정신없이 골목을 헤매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 끝을 찢듯 거칠게 터져 나왔다. 골목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위엔 내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허리를 숙여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송이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마음속과 달리, 거리엔 고요하고 순백한 침묵만이 흩날렸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 뜬 눈에 비친 세상은 조금 더 하얗게 번졌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살인자를 찾겠다며 무작정 집을 나왔다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제정신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캔버스 앞에서 추잡한 붓질을 하며 끙끙 앓던 그 순간부터.
나는 가끔 기억을 잃었다. 격한 감정 속에서 저지른 일들은,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희미한 그림자처럼 남았다. 마치 제삼자가 찍어놓은 사진처럼, 기억의 단편적인 장면들만 머릿속에 뒤죽박죽이었다. 허공의 파편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기억을 복기해도, 남이 한 일을 관찰하는 듯 해 감각적으로 와닿지가 않았다.
그날 밤, 살인자를 처음 본 순간도 그랬다. 오늘 낮에 그림을 그리던 기억도. 그리고 눈발 속에서 헐떡이는 지금 역시, 곧 희미한 파편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를 밀치며 휘몰아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씩 건져내어 입 밖으로 뱉는 것뿐이었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말들을 한참 중얼거리다가, 겨우 숨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체계적으로 구역을 나눠 돌아다닌 것이 아니었기에, 이곳이 이미 지나온 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기보다, 그저 걷는 것이 목적이라도 된 사람처럼, 맥없이 발을 내디뎠다. 막막함은 족쇄가 되어 발목을 조이고, 시간은 매서운 찬바람이 되어 얼굴을 후벼 팠다. 감각은 하나둘 꺼져갔고, 끊어지기 직전의 정신만 겨우 붙든 채, 몽유병자처럼 골목을 헤맸다.
발자국이다.
길바닥에 찍힌 그것을 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초연하게 등장한 그 발자국, 그녀의 것임을 직감했다. 숨이 거칠어졌다. 발자국 옆에 조심스레 발을 맞추며 걸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고, 발걸음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방향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발자국을 따라 골목을 지나치고 또 지나쳤다. 그것은 계속해서 나를 골목의 깊은 구석으로 이끌었다. 심장이 빠르게 뛸수록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머리는 이미 바라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고, 눈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찾듯 그것을 갈구했다.
그러나, 그 끝에 기다리고 있던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허름한 남색 노동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골목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대충 묶인 머리, 잿빛으로 얼룩진 얼굴, 축 처진 어깨.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찾던 존재가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공장에서 몇 차례 사고를 일으킨 끝에 일자리를 잃고 떠돌던 사람이었다. 초췌한 모습의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나를 훑어보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잠시만요!” 내가 소리치자, 그녀는 멈춰 서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게, 여기 오는 길에 키가 작은 여자를 본 적 없으세요?”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아니야…”
“... 네?” 내가 되묻자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디바이스를 꺼냈다. 화면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시간이 없어. 오해받으면 안 돼. 당장 꺼져!” 그녀는 나를 세차게 밀쳤다.
"잠시만요, 왜 이러세요!" 나는 당황하며 팔을 저항하듯 뻗었지만, 그녀는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공허한 눈이 내 등 뒤를 향했고, 무언가를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건장한 북유럽계 남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남자는 유독 덩치가 컸으며, 턱수염이 잔뜩 나 있었다.
“분명 혼자 오라고 말했을 텐데.” 덩치가 큰 남자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덜덜 떨던 여자는 고개를 홱 치켜들고 소리쳤다. “내, 내가 데려온 거 아냐. 모르는 사, 사람이라고오!”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 남자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운데의 남자가 내게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어이, 저 여자 알아?”
난 당황한 나머지 한 발짝 물러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코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덩어리처럼 뭉쳐진 수염이 그의 콧김에 흔들렸다. “우리가 뭐 하는지는 알아?”
“... 모릅니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껄껄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운이 좋군. 우리는 ‘X 연구소’ 소속 직원이다. 모두 알다시피, '통일 지구 중앙회'의 신임을 받는 연구소지. 우리가 진행 중인 ‘합법적인’ 실험에 피실험자가 필요해. 피실험자에겐 안전과 고액의 보상을 보장한다. 어때, 생각 있어?”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여자가 휘청거리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나는?! 당신들, 분명 나를 데려가기로 약속, 먼저 약속했어. 약속했잖아! 나도 데려갈 거지? 그렇지?”
그녀는 커다란 남자의 팔에 매달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축축한 돌담에 들러붙은 이끼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큼직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벽으로 내던졌다.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힌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고, 뒤틀린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남자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닥에 쓰러진 여자의 일그러진 손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불량품'이었잖아.”
세 남자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왼편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너라도 데려가야 할당량을 채울 수 있겠어. 순순히 따라와야 피차 편할 거야.”
나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이며, X 연구소는 무슨 실험을 하려는 건지, 왜 그녀의 팔은 저토록 쉽게 으스러졌고, '불량품'은 또 무슨 의미인지. 그러나 이 상황이 '합법'이라는 말과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세 남자는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계속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덮쳐올 기세였다.
그 순간, 왼쪽에 있던 남자가 팔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그 남자는 내 옆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쿵!
커다란 턱수염 남자도 맥없이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쿵!
곧바로 오른편의 남자까지, 줄지어 나란히 고목처럼 쓰러졌다. 나는 잔뜩 크게 뜬 눈으로, 주위에 쓰러진 세 명의 덩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성대한 만찬을 앞에 둔 사람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작은 살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