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총은 쥐어졌다

by 꿀꾀배기


“소비라는 행위는 자원을 사용하고, 찌꺼기를 뱉어내는 일련의 과정이야. 무슨 말이냐면, 인간은 그냥 쓰레기를 뱉는 기계라는 거지. 숨만 쉬어도 뭘 태우고, 더럽히고, 썩게 만들어. 하지만 자원은 늘 부족하니까, 그걸 더 차지하려면 아득바득 싸울 수밖에. 그렇게 뺏어낸 걸 또 처먹고 뱉어내고. 끝도 없어. 결국 남는 건 쓰레기뿐이야. 그게 선을 넘어버리면, 자연도 결국 자생을 포기하겠지. 걸어 다니는 재앙이나 다름이 없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찢어 죽이고 싶은 존재 아닐까? 모든 걸 앗아가고, 짓밟고, 망가뜨리고, 외면하는 우리가."

무더운 여름이었다. 탈탈거리는 구식 선풍기, 꿉꿉한 휴게실. 나는 에너지바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연설하고 있었다.

“... 그래서 그게, 지금 당장 쪄 죽을 것 같은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데?”

책상에 엎드려 땀을 뻘뻘 흘리던 동료가 대꾸했다.

“작정했나 보지. 찢어 죽이려고 말이야. 화산도 터뜨리고, 지진도 일으키고. 벌레 떼랑, 이 살인적인 더위까지.”

동료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선풍기 쪽으로 돌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다만 억울하다는 거야. 우린 폭탄 돌리기에서 진 거라고. 긍정적인 말들로 공해는 전부 덮어버리고, 막상 그렇게 얻은 이익은? 앞 놈들이 싹 다 쓸어먹고 나서, 잔해더미만 우리한테 떠넘긴 거잖아.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냐고. 물 500ml가 일주일 치 식량값인 세상에 그냥 태어나버린 건데. 씨발, 이것도 웃기는 거야! 인간들끼리 약속한 종이 쪼가리로 자원의 가치를 정하고, 상품처럼 주고받고. 천연자원을 경제재로 취급하려는 사고가, 파괴의 정당성을 인간이 돈으로 인정해 준다는 발상이 얼마나 오만해? 자원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를 인간이 부여한다는 게 말이 돼?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내가 언성을 높이자, 동료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네 말대로면, 자연이라는 게 참 멍청하네. 쉘터의 인간들은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도 따뜻하게 산다잖아? 왜 애먼 우리만 찢어 죽이려고 난리야? 걔는 정의라는 걸 모르냐?”

나는 아무 대꾸 없이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쪽지 모양으로 접은 그것을 책상 위에 던졌다.

“정의? 내가 아는 역사 안에선, 살아있던 적이 없었어. 정의라는 게 있다면, 심판자가 내려와야 해. 인간 따위가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가. 잘못한 놈들만 쏙쏙 골라 벌주고, 자원을 공정하게 나눌 수 있는 존재.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말이야.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걸? 날개도 달려 있어야 할 거야.”

우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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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씨?”

H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 네?”

앞엔 여전히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쉼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사람들이 치렁치렁 걸친 장신구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찌르며 정신을 어지럽혔다.

“이 작품 말입니다. 제가 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하는 금액으로 맞춰드리죠. 이보다 더 화려한 등단은 없을 겁니다. 또 저희 갤러리와의 계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실까요?”

H가 말을 이어갈 때마다 성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고, 군중은 웅성거렸다. 그저 서둘러 이 소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야기 나누시죠. 조용한 곳에서요.” 잔뜩 찡그린 눈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H는 미소를 지으며 비서를 불렀다. 그 비서는 G였다. G는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저를 따라오시죠.” G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가 G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를 따라갔다. 우린 1층 구석의 어느 방으로 향했다. G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책자를 하나 건넸다.

“여기, H 갤러리와 계약한 작가들입니다. 하나같이 세계적인 작가들이죠.”

책자를 훑었다. 이름 하나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제야 그 앞의 인물이 G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당신 같은 무명작가가 입에 담기도 조심스러운 최고의 갤러리라는 말입니다. 당신 작품이 그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G의 말은 아직 혼란에 빠진 내 정신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다시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게 누군가 앞에서 세상을 움직일 때, 당신은 남 밑에서 명령이나 받고 일하는 이유겠지. 사람은 자기 그릇만큼의 세상밖에 못 보거든.”

G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E 구역에서 기어 다니던 놈이 지금 뭐라고…?”

G가 위협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나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또, 장미꽃 냄새가 온 신경을 자극해 오던 찰나, 문이 열리며 H가 들어왔다.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한시라도 빨리 대화하고 싶었으니까요.”

H의 등장에 G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표정을 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충성스러운 강아지가 따로 없군.' G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H는 책상 건너편에 앉아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3층의 작품을 포함해, 다음 시즌까지 3점을 저희 갤러리에 납품하신다면, 이만큼의 금액을 드리겠습니다.”

H가 건넨 디바이스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한 번에 얼마인지 알아보기 힘들 만큼의 액수였다. 1층에서 본 나뭇조각 작품을 수십 개는 살 수 있는 금액. 그게 얼마인지 더는 중요하지 않은 수준의 금액. 이걸로 할 수 없는 게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다. 아득한 기분에 눈을 감고 디바이스를 내려놓았다.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신인 작가에게 이 정도 제안을 하는 갤러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H가 약간 놀란 듯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잠시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목에 반짝이는 시계를 보았다. 깔끔한 라인의 양복을 보았다. 멋들어진 가죽 구두를 보았다. 목을 감싸고 내려오는 넥타이를 보았다. 방금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떠올렸다. 초라하고, 멋없는 생각이었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인테리어, 책상 위 디바이스, 그리고 H의 뒤편,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G를 보았다. 왼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보니까, 참 별것 없는 사람이었구나.



“솔직히 조건이 좀 아쉽네요. 다음 시즌쯤엔 제 몸값이 지금과는 다를 테니까요. 노예 계약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나는 손톱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G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H는 의외로 담담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지...?”

“제시하신 금액만큼의 선금을 추가로 받겠습니다. 그리고, 쉘터에 살 곳이 필요하니 거처를 마련해 주신다면, 계약에 더욱 긍정적이겠네요.” 내가 말을 끝내자, H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좋습니다. 내게 금액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원 뒤편, 후문 근처에 별채가 하나 있으니 그곳을 드리죠. 내일부터 입주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만족하십니까?”

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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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떠난 이후, 금으로 장식된 찻잔에 조용히 차를 따르는 H에게 G가 말했다.

“도대체 E 구역의 뭣도 없는 노동자 나부랭이에게 왜 그런 대우를 해주시는 겁니까? 고작 저 보라색 작품 하나를 보시고…”

H는 말없이 향을 맡았다 “너는 노동자 한 명을 본 모양이지?” 짧게 말을 내뱉은 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아니면 뭡니까? 고위급 인사의 숨겨진 아들이라도 됩니까?”G가 답답해다는 듯 말했다.

H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G는 찻잔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 알게 될 거야. 그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G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J와 닮은 정부 인사가 있는지 고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한 사람이, 군중 속 고독에서 억겁의 시간을 홀로 보내다가, 어쩌면 자신과 같은 시선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아니, 내가 보는 지평선 그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발견했을 때의 그 벅차오름과 설렘, 해방감, 환희를. H의 손이 떨리던 그 이유를, G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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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존은 파멸의 과정이다. 양(+)의 흐름이 아니라 언제나 음(-)으로만 흐른다. 근시안적인 사고로 쌓아 올린 인간의 문명은 모래성과 같다. 쌓으면 쌓을수록, 무너질 가능성도 커진다. 결국 누군가는 무너지는 모래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죽음의 러시안룰렛. 언젠가는 터진다는 걸,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걸 알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 순서가 나만 아니면 되는 것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면 두렵고, 억울하고,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내 손에 총이 쥐어질 때의 정복감은, 짜릿하기만 하다. 이 세계는 제로섬이다. 누군가 풍요로운 이유는 누군가가 굶주리기 때문.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약탈하고, 짓밟고 죽이며, 오직 나만을 위해 타인을 밟고 올라선 자들이 언제나 달콤한 과실을 입에 물었다. 언제까지 평등을 믿을 텐가. 언제까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신화를 품을 텐가. 언제까지, 당신은 다르다고 믿을 텐가.

...

아, 그 사이 맞은편의 남자가 장전을 마치고, 당신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억울하겠지만, 어쩌라는 말인가?

당신에게 총이 쥐어졌다면, 당신도 방아쇠를 당겼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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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내가 아는 역사 안에선, 살아있던 적이 없었어. 정의라는 게 있다면, 심판자가 내려와야 해. 인간 따위가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가. 잘못한 놈들만 쏙쏙 골라 벌주고, 자원을 공정하게 나눌 수 있는 존재.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말이야.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 걸? 날개도 달려 있어야 할 거야.”

우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통일 지구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 공정하게 자원을 나누고, 불공정한 일에 규제를 가하고, 소득을 재분배하고.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며?” 동료는 다시 선풍기 쪽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통일 지구에 입에서 불 뿜는 사람은 없었어. 날개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달아줬던 것 같은데… 날개가 뜯기고, 타락해버렸나 봐.” 내 말에 그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다시 선풍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가 물었다. “너는 어떨 것 같아? 갑자기 네가 벼락부자가 됐어. 근데 가진 것의 반을 세상에 환원하래. 그럼 할 거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말해 뭐 해? 당연하지. 운이 좋아서 큰돈을 얻었을 뿐이야. 열심히 사는 노동자 친구들의 복지를 위해선 기꺼이 내야지. 그들이 세상을 위해 해준 게 얼만데. 그리고, 반을 내고도 남은 돈이 충분히 있을 거 아냐? 그거면 된 거지.”



마침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우린 꿉꿉한 휴게실을 떠나 자신의 작업 위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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