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쉘터 천장의 가짜 하늘은 저녁노을을 흉내 내고 있었다. 거대한 저택 앞에는 화려한 옷을 걸친 손님들과, 그 주변을 기웃거리며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손님들은 장신구를 무더기로 달고, 이해할 수 없는 색감과 소재의 옷가지를 겹겹이 입은 채, 서로에게 취해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전시라도 하듯, 하나같이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입구는 정원으로 꾸며진 작은 통로였다. '이것만 해도 내 집보다 크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길을 걷다, 검은 양복 차림의 가이드와 마주쳤다.
“실례합니다. 초대장을 확인해도 될까요?”
정문 앞에는 서너 명의 가이드가 초대 손님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디바이스를 꺼내 초대장을 내밀었고, 가이드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가벼운 웃음을 지어주었고 정원을 지나 저택의 덧문을 열었다.
멀리서 얼핏 보았을 때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그 거대한 공간은 압도적인 위용으로 다가왔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다양한 조형물과 섬세한 동상이 새겨진 분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양쪽으로 펼쳐진 오픈형 건물이 정원의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음료와 장식적인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손님들은 그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거닐고 있었다.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았다. 꽃과 식물은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분수의 조각 양식은 어떠한지, 조명은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오픈 홀의 장식 취향은 어떠한지. 모두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도시공원의 잡초나 들꽃, 평범한 나무 외에는 자연물을 본 일이 드문 나에게도, 이 정원의 식물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진한 붉은빛, 이질적인 노란 줄무늬, 기하학적인 꽃잎. 정원은 각기 다른 시선을 유혹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형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양식,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경계 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제각각 존재감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서로를 지우고, 덮고, 삼켰다. 각자의 특징만을 요란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눈앞의 장면을 천천히 머릿속에서 해체하고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저 테이블 위에 있는 화병을 치우고, 대신 아까 보았던 낮은 조명을 비스듬히 흘린다. 과한 조형물은 뒤로 밀고, 색상 대비가 조화로운 조각상으로 균형을 맞춘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포인트가 하나, 그 곁에 조용히 시선을 붙잡는 여백을 둘 것. 그러자 각기 다른 취향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다양한 감각이 어우러지는 정돈된 조화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문득 이곳에 오며 스쳐 지나온 도시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 내막이 명확해졌다. 이 도시의 조형적 트렌드와 장식 미학을 선도하는 인물이 바로 H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저택에서 이와 같은 디너쇼를 열었을 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만찬회가 아니라 하나의 전시회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초대된 이들은 모두, 모든 것을 소유한 채 지루함에 시달리는 자들이었다. 새로움을 갈망하는 그들의 본능은 H의 전시회에서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폐쇄적인 쉘터에서, '무한한 새로움’은 존재할 수 없었다. 새로움을 대중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의 명성과 우월감에 흠집이 날 것이고, 그로 인해 다급해졌음은 그가 내건 공모전 포스터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H의 강박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미를 실험하며 왜곡했고, 결국 본질을 잃은 조형물들과 패션, 건축 사조가 이곳을 뒤덮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공통된 무의미함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H는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헤매는 길과 진짜 아름다움은 서로 엇갈린 평행선 위에 놓여 있었지만, 이곳의 대다수는 그런 차이를 구별할 능력조차 없어 보였다. 장식적 요소에만 매몰된 시각. 허울뿐인 평판과 트렌드에만 휘둘리는 미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도 모르는 자들이, 스스로를 ‘감식가’라 자처하고 있었다.
어떤 양식인가? 마감은 얼마나 정교한가? 특별한 차별점은 무엇이 있는가? H라는 남자가 고뇌하며 찾아냈을 수많은 작품들은 다양한 미적 비평 포인트를 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감상자들의 해석 관점은 오직 하나였다. '그래서, 얼마나 화려한가?'
체제를 소수의 엘리트들이 움직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열등하다고 여긴 자가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건 참기 힘든 법이라고 했던가. 나는 혐오감이 밀려와 어금니를 잘근 깨물었다.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H에게 격한 연민이 느껴졌다. 아름다움의 무게를 짊어졌다는 이유로, 이 혼란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 자. 그는 지금 얼마나 외로울까?
그러던 중,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사람들의 대화가 흐트러졌고, 하나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이 과도하게 휘황찬란한 무리 속에서, 오히려 나의 절제된 복장이 눈에 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포멀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버건디의 잔향이 감도는 재킷, 실버 포인트가 들어간 시계와 피어싱. 살짝 드러낸 이마와 긴 가일 컷. 기장 짧은 재킷과 은색 액세서리는 형식 속의 과감한 시도였고, 그 콘셉트는 지금, 아주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 옷차림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어떤 형태로든 타인의 눈길이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어릴 적 이상이 담긴 스케치북을 펼쳐 보였을 적에, 그들은 침묵과 외면으로 답했고 그것은 내가 스케치북을 꾹 덮어버린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수십 개의 눈동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오픈 홀 사이를 지나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마치 모든 소음이 물아래로 가라앉듯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추고, 움직이는 것은 나와, 나를 따라 움직이는 시선뿐이었다. 그들에게 여유롭게 웃음을 건넸다. 좌우의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그 모든 시선을 즐겼다. 입꼬리가 떨렸고, 숨결은 점점 뜨거워졌다.
내가 지나가자, 음소거가 풀리듯 오픈 홀이 일제히 어수선해졌다. 입으로 새어 나오는 쾌감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창고에 오래 방치한 기계를 다시 작동시킨 것처럼, 몸 깊은 곳에서 익숙지 않은 거친 진동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 흐르는 핏줄기가 하나하나 뜨겁게 느껴졌다. 눈은 갓 태어난 짐승처럼 생기를 쏟아내고, 심장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요동쳤다.
나는 이런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이었다.
오픈 홀 건물 사이로 이어진 중앙 길에도 찬란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주변 공간을 분해한 뒤 다시 조합했다. 마치 무대를 꾸미는 연출가처럼, 꽃과 나무를 옮기고, 조명의 색감과 조도를 조정하고, 배경의 백색소음까지 섬세하게 조율했다. 그러자 주변은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좁은 길은 금세 끝이 드러났고, 그 너머로는 앞선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차분하고 정적인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테이블과 의자, 장식들이 촘촘히 세팅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곁을 피해 조용한 자리를 하나 골라 앉은 다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머지않아 자리는 사람으로 가득 찼고, 사회자가 등장하며 디너쇼가 시작되었다. 유명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고, 곡예와 마술 같은 화려한 볼거리가 이어졌다. 스타 셰프들이 준비한 요리와 음료가 테이블마다 분주히 서빙되었다. 압도적인 미각의 향연 속에서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디너쇼를 즐기며 옆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쇼가 끝난 후, 초대된 사람들은 건물 내부로 안내되었다. 외관처럼 내부 역시 새하얗고 정갈했다. 공간을 둘러보던 중 검은 정장을 입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H의 비서진 중 하나인 G였다. 그가 앞으로 나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은 모두 탁월한 심미안과 미적 욕구를 지닌 고귀한 교양인입니다. H 님이 올 한 해 동안 직접 엄선한 많은 작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자유롭게 감상하시길.”
사람들은 중앙에서 흩어져 각 층으로 퍼졌다.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눈길을 붙잡는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마티에르에만 집착한 구 세기의 폐허 같은 그림들, 서툰 솜씨에 개념만 억지로 끼워 넣은 유아적 작품, 노인이 젊은 감각을 모방해 어설프게 흉내 낸 듯한 민망한 시도들.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난해하고 난잡한, 의미를 가장한 혼란뿐이었다.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의미를 알고는 있는 걸까? 묵묵히 감상하는 저들은 과연 어떠한 심미적 고뇌를 하고 있을까? 예술 감상이 높은 수준의 교양 행위라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없었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하면서 서로 이해하는 척을 하는 이 참담한 행위가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을까?
왼 편, 불에 태운 나뭇조각을 캔버스에 붙여놓은 작품의 한쪽 구석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양복을 500벌은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빨간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이 작품을, 저 가격에 샀다는 뜻이다. 그 사람은, 저 작품을 통해서 값어치를 충족하는 미적 감동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에너지바 2천5백만 개'를 살 수 있는 돈을 쾌척할 만큼의 무구한 감동을 말이다... 정말 그런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3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동안, 에너지바 서너 개를 사기 위해 공장 거리에서 새벽부터 헤매던 과거를 떠올렸다.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삶이 눈앞에 겹쳐졌다.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상층의 세계가 자원을 독점하고 있을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삶의 구성과 그 값어치의 차이를, 그 적나라한 현실을 이렇게 두 눈으로 마주하니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층은 H의 개인 컬렉션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그곳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였다. 내 눈에도 어느 정도 감상의 의지를 고취할 만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저 너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구역이 보였다. 1층에 있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그곳에 모여 있는 듯했다. 어떤 작품이 저토록 사람을 끌어들이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익숙한 향이 코를 스쳤다. 어딘가 포근하고 따뜻한, 꽃인가...?
그 순간 시야에 보라색의, 감각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빛이 덜컥 들어왔다. 그곳에는, 내가 공모전에 제출했던 바로 그 작품이 있었다.
숨이 멎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가시처럼 날 선 향이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수습할 새도 없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려졌다. 그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H였다.
“J,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불세출한 대작의 주인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제가 마침내 발굴해 낸 숨어 있던 거장, J입니다!”
H는 손을 높이 들고 외쳤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환호했다. 누군가는 악수를 청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고, 수많은 카메라가 분주히 셔터를 눌렀다. 그 소란에 건물 전체가 술렁였다.
나는 그 혼란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찰나, 모든 감각을 휩쓴 건 그 향기뿐이었다. 강렬한 스파이스, 묵직한 꽃 향. 모든 현실의 소음과 자극들은 그 향의 뒤편으로 아득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