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 제작한 양복과 액세서리를 갖춰 입은 나는 쉘터 입구에 섰다. 쉘터는 시꺼멓고 거대한 철제 밥그릇 같았다. 어쩌면 외계인의 흔적 같기도 했다. 매끄럽고 차가운 표면은 인간의 손길보다는, 타 생명체의 조형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멍하니 감상하던 내게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쉘터에 볼 일이 있으신가요? 저는 출입 관리원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머니에서 디바이스를 꺼냈다. "아, 네. 초대를 받았습니다. 여기 출입증이..."
"보안 문제로 디바이스 검사를 먼저 진행한 뒤, 출입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디바이스를 주시겠습니까?" 관리원은 디바이스를 받아 들고 벽면의 보안 탐색기에 갖다 댔다. 노란 불이 잠시 점멸하더니, 곧 초록 불이 켜지며 맑은 효과음이 울렸다. "완료되었습니다. 출입증은 전자지갑에 등록하셨나요?"
"네. 거기 밑을 밀어 올리시면..."
관리원이 지시대로 손가락을 밀자, 전자지갑 창이 열렸다. 제일 앞 페이지엔 H가 보내준 출입증이 있었고, 그 옆 페이지엔 아카데미의 배지가 보였다.
"아, 아카데미 분이셨군요? 옷 태가 좋으시더라니." 관리원이 배지 창으로 화면을 넘기며 웃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등교할 때 항상 이걸로 출입하셨을 텐데. 인스턴트 출입증은 굳이 안 쓰셔도 되죠."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심사기에 디바이스를 갖다 댔다. 하지만 장치는 반응하지 않았다.
"쉘터 안에도 아카데미가 있었나요?" 내가 묻자, 관리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아카데미는 쉘터 안에 있죠. 그런데 이게 왜..." 그는 기기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아마, 휴학 중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냥 인스턴트 출입증으로 해주세요."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관리원의 말에 나 또한 의문이 들었지만, 왠지 캐물어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관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면을 다시 출입증 쪽으로 슬라이드 했다.
"그런가... 아, 출입증은 정상적으로 인식됐네요. 입장하셔도 됩니다."
초록 불이 반짝이며, 쉘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디바이스를 받아 들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쉘터에서 좋은 시간 되시길, 아카데미의 신사 분."
관리원의 인사를 뒤로한 채, 드디어 쉘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릴 적 선전 영상에서만 봤던,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평생 올 수 없을 줄 알았던 곳. 그 미지의 세계 앞에서 나는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뱃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한겨울임에도 이곳의 공기는 봄처럼 따스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보며 천천히 걸었다.
'너무나도 찬란해서, 다시 돌아가기 싫어지면 어떡하지?'
짧게 숨을 내쉰 뒤, 코로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난 외마디 탄식밖에는 뱉을 수 없었다.
A 구역의 뒤틀린 도시 전경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아수라장이었다. 모든 건물들이 작가의 서명이 찍힌 작품처럼 고집스럽고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지 않았다. 개성을 좇다 찌그러진 진주 껍데기, 위태롭게 허물어진 매너리즘의 절벽, 도무지 조화를 모르는 눈먼 예술의 잔해들이었다.
마치 잡지, 만화책, 신문, 동화책을 오려 붙인 콜라주 포스터 같았다. 차라리 E 구역의 무미건조한 회색이 나았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허공을 헤맸다. 시각적 소음공해에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초록색 들판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시신경을 유린하는 혼돈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늑하고 편안함을 주는 이미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홀린 것처럼 그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쉘터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중앙 농원'
입구에 세워진 기다란 스크린에 문구가 떠 있었다. 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선전 영상에서 본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꽃과 나무가 아기자기하게 심어진 공원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농경지가 이어졌다.
오랜 전쟁으로 오염되고 황폐해진 지구에서, 농사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일 뿐이었다. 땅은 죽었고, 먹을 수 있는 곡식은 자라지 않았다. 인류는 실험실에서 만든 캡슐과, 곤충으로 만든 압축 에너지바로 생존을 이어갔다. 그러나 여기, 쉘터에서는 여전히 ‘자연’이 살아있었다. 아니, 재건된 ‘자연의 형상’이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질서 정연히 숨 쉬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풍요가 아니라, 쉘터와 그 밖의 삶의 차이를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경계였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벌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녔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농원의 경계 밖으로도 날아가지 않았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오직 꽃과 작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갈 뿐이었다.
근처의 안내판에서 디바이스를 태그 하여 책자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중앙 농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화면에 문구가 뜨며 인터페이스가 열렸다.
안내 책자를 읽으며 중앙 농원을 걸었다. 책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수많은 벌들은 실제 생물이 아니라 R사에서 개발한 초소형 로봇이었다. 꽃가루를 실어 나르는 건 물론, 농작물의 상태를 감지하고 시스템에 보고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고 적혀 있었다. 특수한 비료 덕에 악취도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아무리 코를 킁킁거려 봐도 흙의 따뜻한 냄새 말고는 아무것도 맡을 수 없었다. 황금빛 들판을 지나 걸었다. 밀과 벼, 생전 본 적 없는 다양한 색과 크기의 작물들. 이 빨갛고 동그란 건 토마토. 초록색 커다란 풍선같이 생긴, 검은 줄무늬가 그려진 저건 수박. 스팀 샤워기의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거품처럼, 동글동글 알맹이가 잔뜩 달린 이건 포도...
그러다 문득, 눈앞에 선명한 붉은빛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딸기였다.
딸기맛 에너지바의 포장지에 그려졌던 바로 그 모습. 그러나 이것은 그림이 아닌 진짜였다. 표면에 박힌 씨앗들, 살짝 말린 이파리, 투명한 햇빛 아래 반짝이는 과육.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딸기를 하나 땄다. 손끝에 싱그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것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과육이 부드럽게 으스러지며,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처음 느껴보는 자극에 침샘이 저릴 정도였다.
'예상은 했지만... 딸기맛 에너지바는, 딸기맛이 아니었구나.'
딸기는 입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전히 향이 남아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식욕이 돋고, 허기가 몰려왔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아니라, 처음으로 찾아온 욕구였다. 입안 가득,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 농원의 모든 과실들을 하나씩 입에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 많은 맛을 혀로 느끼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때, 디바이스가 반짝이며 알람을 울렸다.
'디너쇼 한 시간 전'
알람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농원을 빠져나올 때, 나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디너쇼에서 마주하게 될 음식은 얼마나 황홀한 맛일까? 단지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오랫동안 굳게 잠겨 있던 어떤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일이 이렇게까지 기다려졌던 적이 있었던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