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의 축축한 감촉에 눈을 떴다.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이 샌 건가? 그러나 천장은 여전히 매끄럽고 하얗기만 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터져 나왔다. 간신히 막혀있던 거친 숨이 연이어 쏟아졌다. 가슴 언저리에 구멍이라도 난 듯 심장이 욱신거렸다. 당혹스러운 기침을 두세 번 뱉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눈물이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꿈은 아스라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중한 걸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 온몸에 번졌다. 마치 밤새 무언가를 쫓아 뛰어다닌 것처럼, 잠을 잤는데도 여전히 피곤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픔이 가슴속에서 발만 동동 굴러댔다. 지난밤 꿈의 내용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한 줄기 향기만이 어렴풋했다. 꽃의 향기였을까?
잘 모르겠다.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호한 꿈 따위에 헛손질할 생각은 이제 없었다. 이미 끝나버린 이상 무슨 내용이든, 현실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언제 괴롭기라도 했냐는 듯, 별 의미 없는 감정들을 툭툭 털어내고 나서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통은 잠들기 전에 씻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한 다음 스팀 샤워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원을 누르자,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뿌연 김이 사방으로 퍼졌다. 기계 구멍 곳곳에서 피어오른 연기엔 세척 작용을 하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입안에는 은근한 쓴맛이 맴돌았다.
5분쯤 지나고 기계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화장실을 나선 다음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대충 밀어 넣어둔 남색 노동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옷장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낡은 옷가지들로 가득 찬 내부는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방 한편엔 피로 얼룩진 검은색 후드와 점퍼가 널브러져 있었다. 후드의 등판에 그려진 장미 자수는 검붉은 얼룩으로 뒤덮여 썩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마를 짚었다. 중요한 외출에 입고 나갈 깔끔한 옷 한 벌 없다니, 도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인생을 살아온 걸까. 괜히 화가 났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무엇 때문인지 특정 지을 수 없었지만, 어딘가가 터질 듯 답답할 뿐이었다.
어젯밤, 미스터나인에서의 격정적인 순간이 지나가고, 작은 살인자는 여느 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홀감이 가시지 않은 채 나는 작품을 마무리했고, 무거운 숨결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여운을 되새기던 중, 디바이스 알림음에 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디바이스를 들어 확인하자, 줄곧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H의 매니저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H가, 쉘터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열릴 디너쇼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초대장과 함께 쉘터 출입증, 그리고 '교통비'라 적힌 메모와 함께 지나치게 큰 액수가 내 계좌에 입금돼 있었다.
그런 상상을 했다. H가 작품을 본 후, 압도적인 황홀경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채 허둥대며, 부끄러운 몸짓으로 비서에게 초대장을 보내라고 지시했을 장면을. '이 밤중에, 그것도 바로 다음 날 열릴 디너쇼의 초대장을 보내다니. 꽤나 급했나 보군.'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런 망상을 이어가다 보니 마음은 이미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옷장으로 걸어가, 검은 긴팔 티와 회색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었다. 새 옷을 사려면 예정보다 일찍 나서야 했다. 머리를 대충 정리한 다음 디바이스로 잔고를 확인했다. H가 보낸 '교통비'는 새 옷을 사고, 중앙 도시에서 한 끼를 즐기고, 저택으로 가는 교통편까지 감당하고도 충분히 남을 액수였다. 어쩌면 H가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책정한 걸지도. 아니면, 어차피 그에겐 애들 장난 수준의 돈, 0 몇 개 여유롭게 찍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그 돈의 일부로 옷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한평생 억눌러온 '미'에 대한 갈망이, 지금 나를 폭풍처럼 뒤흔들고 있었다. 내 욕망이 이렇게까지 강하고 빽빽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토록 깊고 광활한 갈증을, 고작 500ml 생수 한 병으로 채우려 했었다니.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살짝 저려왔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바닥으로 전부 토해냈다. 그러고는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집을 나섰다. 마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처럼 느껴졌다.
E 구역은 대륙의 외곽에 형성된 공업지대였다. 중앙 도시라고 주로 불리는 A, B 구역과는 거대한 황무지를 사이에 두고 지하 터널로만 연결되어 있었고, 공장에서 생산된 가공품들이 그 터널을 통해 수송됐다. 사람들 간의 이동은 드물었고, 개인 차량이 없다면 대개 화물차에 몸을 싣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나에게도 개인 차량 같은 건 없었다.
쉘터는 A 구역에서도 중심부에 있었고, 갈 길은 멀었다. 정류장에서 홀로 선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운전기사 딸린 차량 하나 보내줬으면 좀 좋았을 텐데." 투정이 터져 나왔다. 그때 흙먼지를 뿌리며 화물차 한 대가 정류장 앞에 섰다. 외벽엔 R 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삐걱이며 내려가고, 캡모자를 쓴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중앙 도시에 볼 일이라도 있나?"
"네. 자리가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웃고는, 운전대 옆에 놓인 디바이스를 꺼내 들고 창밖으로 내보였다.
“자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뭐 그런 거지.”
디바이스를 꺼내 송금액을 입력하고, 노인의 기기에 갖다 댔다. 에너지바 200개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짧은 진동이 울리고, 노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금액을 확인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 뒤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버튼을 누르자, 짐칸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많이 흔들릴 거야. 속 게워내지 않게 조심하라고.”
노인은 담배를 물며 불을 붙였다. 나는 짐칸 안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먼지 냄새가 가득해 숨쉬기가 버거웠다. 허벅지 높이의 상자를 하나 골라 걸터앉았다. 문이 닫히자 어둠이 몰려들었다. 먼지가 폐로 들이치며 몇 차례 기침이 터졌고, 바닥은 거칠게 흔들렸다.
몸을 웅크렸다. 마치 내 감정을 대변하는 듯한, 캄캄하고 불안정한 차 안. 잘 나가는 회사 R의 화물차치고는 참 낡았다. 못마땅한 마음에 혀를 찼다.
차에서 내린 내 몰골은 그야말로 전쟁터의 피난민 같았다. 온몸은 흙먼지로 얼룩졌고,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났다. 아무리 털어도 더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발을 딛고 선 중앙 도시 A 구역은 바닥에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조금 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건물의 외벽은 빛이 났고, 사람들은 잡티 하나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여러 색이 존재했지만, 내 눈엔 온 세상이 새하얗게, 냉랭하게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가 더욱 지저분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남몰래 고개를 숙이고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디바이스를 꺼내 근처 옷 가게를 검색했다. 가까운 곳을 찾아 걸어간 끝에 도착한 건물은 5층짜리 전면 유리 매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틀에서 불투명한 연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아마 살균 작용을 하는 듯했다.
문이 닫히기도 전,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안드로이드가 기계를 들이밀었다.
“고객님의 오염 농도가 높아, 추가 소독을 진행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계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 푸른 불이 켜지고, 약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기계는 천천히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려갔다.
“뒤로 돌아 주십시오.”
안드로이드는 신발 뒷굽까지 소독을 마친 후에야,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시작부터 요란한 신고식을 치르고 나니,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가게 안의 사람들은 그런 내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멋쩍게 두리번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2층은 남성복 코너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색 운동복과 해진 운동화를 질질 끌고 다니던 나는, 몇 백, 몇 천 개의 에너지바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표 앞에서 주춤했다. 깔끔한 니트 한 벌—에너지바 300개. 데님 바지 하나—400개. 흰 티셔츠 하나조차—100개.
‘티셔츠 하나에 이만큼이나 써야 한다고?’
평생 소비한 에너지바만큼의 금액을 여기서 전부 써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H가 준 돈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순식간에 달라진 단위에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옷을 고르고 있었다. 이들에게 이 옷들은 전혀 비싼 게 아니었다. 내 임금이, 소비 수준으로 대변되는 나의 인생이 터무니없이 저렴했던 것이다.
고른 옷들을 전부 구매한 다음 곧장 갈아입었다. 입고 왔던 옷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거리로 나오니, 고개를 들고 다니기 부끄럽지는 않았다. G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단정한 정장, 가지런한 구두, 액세서리와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 스타일. 깔끔한 멋이 있지만 개성이 없는, 마치 누군가의 그림자 같은 모습. 그리고 그가 드러낸 노골적인 불쾌함.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 안에는 여전히 ‘교통비’라 쓰인 막대한 금액이 디바이스 화면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 정도 소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속이 언짢았다.
달라져야 한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적응해야 한다. 더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도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거니는 사람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음료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나는 그것을 파는 곳을 찾아냈다. 에너지바 25개 정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손에 쥔 음료의 이름은 '커피', 역사 시간에 들었던 것도 같다.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맛이었다. 어색한 쓴맛에 익숙해지며, 이 도시의 공기에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도심으로 가까워질수록 같은 모양의 건물은 찾기 어려웠다. 모든 건물이 똑같이 생긴 E 거주 구역과는 정반대였다. 여기서는 건물 하나하나가 주인의 개성을 드러내듯 색도, 양식도 자유자재였다. 개별로 따져보면 조금 엉성한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그 의도를 잘 살린 듯한 외관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취향을 드러내는 건물들이 한데 모인 도시 전체의 모습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름다운 물건을 주워 모으는 건 쉽지만, 그것들을 서로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은 한 차원 다른 영역.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E 구역의 칙칙한 회색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흰 티 500벌 분량의 금액을 들여 양복을 맞췄다. 명품관에서 시계, 넥타이, 신발을 구매하는 데엔 티셔츠 800벌의 가격을 지불했다. 천문학적으로 느껴지던 소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일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코끝이 변화에 금방 둔감해지듯, 내 경제 감각 역시 순식간에 둔화되었다.
양복이 제작되는 동안,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료로 만든 이름 모를 음식들을 주문하고, 거금을 지불하고, 많은 음식물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그들이 남긴 음식물만으로도 E 구역의 사람들이 평생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뉴판에 쓰인 우아하고 현란한 글자들이 어떤 음식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닭다리 튀김 정식’을 제외하고. 반사적으로 그것을 주문했다. 미스터나인에서 가장 좋아하던 풀고기 다리 튀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퍽퍽한 에너지바에 질려갈 때면 그곳을 찾아, 입안에서 육즙을 뿜으며 바삭하게 씹히는 다리 튀김을 먹었다. 고기라는 건 이런 거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X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건 고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앙 도시의 진짜 고기는 달랐다. 감칠맛으로 짙게 응축된 기름과 수분이 폭죽 터지듯 흘러나와 혀를 감싸고, 머금고 있던 음식물을 다시 휘감으며 뜨겁게 덮쳐오는, 육즙이란 이런 것이었다. 고기를 씹을 때 나오는 어떤 액체라면 모두 육즙이 되는 게 아니었다.
식사라는 행위는 평생,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어떤 덩어리들을 잘게 씹어 삼키는 일, 말 그대로 ‘일’이었다. 내가 밥상에서도 일을 하는 동안, 이곳에서는 모두가 화목한 웃음을 지으며 풍미를 느끼고, 만족을 공유하고, 삶에 행복을 더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식사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황홀함 속에서 분노를 느꼈고, 끝내 허무에 빠졌다. 평생을 거짓된 풍미에 속아 살아왔다는 배신감, 감각조차 갖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무력감 속에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굳은 발걸음으로 식당을 나서며, 멍하니 되뇌었다.
평생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미각의 해방의 대가는 고작 흰 티 몇 장 값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