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실종

by 꿀꾀배기


다음 시즌까지 남은 석 달 동안, 나는 H가 마련해 준 별채에서 작업에 몰두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준비된, 호화로운 궁전 같았다. 나는 쉘터에서의 귀족 같은 생활에 금방 적응했다. 오히려 이곳에서의 삶이 내게 더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비로소 모든 것이 원위치를 찾아가는 듯했다.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열리는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면 눈을 떴고, 안드로이드 집사가 신선한 재료로 차려낸 사치스러운 식사를 즐겼다. 밤이면 머리 위로 별빛이 찬란하게 쏟아졌고, 카나페와 와인을 곁에 두고 정원에서 여유롭게 별들을 감상했다.

남는 시간은 모두 작업에 전념했다. 매일이 절정과 같았다. 평생 쌓아온 열망과 영감을 화폭에 쏟아냈다. 번뜩이는 이미지가 넘쳐흘렀고, 손은 미친 듯이 움직였다. 모든 감각을 서로 연결하고, 즉흥과 우연을 마음대로 조절했다. 내가 이토록 정확하고 섬세하며 치밀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감각을 평생 모르고 살 뻔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료도 완벽했다. 물감은 선명하고, 묵직하며 쫀득했다. 붓은 마치 내 감정을 읽는 듯 부드럽게 춤을 췄고, 흙은 의지를 이해하고 형태로 응답했다. 무르거나 굳지 않았고, 거칠거나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흩뿌리는 물감 자국마저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신의 경지라는 게 이런 기분일까?



G는 더는 나를 대놓고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 주변을 맴돌며 한참을 지켜보다 떠나곤 했다. 흠이라도 하나 찾아보려는 속셈이었을까? 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거라곤, 열정에 들뜬 나의 눈빛과, 성취감으로 가득 찬 표정뿐이었을 것이다.

G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E 구역에서 그가 봤던 초라한 노동자는 이제 여기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표정은 질투에서 공포로 바뀌었다. 출신 지역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는 그에겐 내 존재 자체가, 마치 세상의 설계 밖의 오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G가 동료 비서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나의 전시회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내 오만한 예술이 대중 앞에서 조롱당하는 광경을 꿈꾸고 있다고. 아직도 도태된 게 본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안쓰러운 인간. 과연 바라는 날이 올지 한번 지켜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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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실종이라고요? 저희 구역에서요?" 모니터를 바라보던 K 서장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4 연구소장이 외근 나갔다가 E 구역에서 실종됐어. '망치'도 둘 달고 갔는데 말이지. 지난번에도 망치가 세 개나 망가졌었고, 아무래도 그쪽에 뭔가 있는 것 같군." 화면 너머에는 안드로이드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가 쓴 경찰모에는 꽃 모양 배지 두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부 충돌로 정리된 것 아닙니까? 망치들끼리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망치끼리는 그렇지. 하지만, 연구소장은 아니야. 망치는 주인을 공격하지 못하게 뇌를 만져놓는 거, 알고 있을 텐데."

K는 대답하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지금까지 자네가 해준 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나?" 안드로이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의 매끄러운 얼굴 위로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 정말 없었습니다. 실험체 모집 중 발생할 '사고'에 대한 처리, 전 시키는 대로 일했고, 수상한 건 본 적 없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당연히 바로 보고 드렸을 겁니다..."

비좁은 서장실에 백색소음만이 흘렀다.

"그랬겠지. 하긴, 자네가 일을 망칠 이유도 없고." 잠시 뜸을 들이던 안드로이드가 덧붙였다. "B 구역에 있는 가족은 잘 지내나? 딸은 약혼했다던데."

K의 관자놀이를 따라 굵은 땀이 흘렀다. "... 예. 다가오는 봄에 결혼식이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군.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축의금은 기대해도 좋아. E-1300번대 구역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니잖아? 현재 서에 인원은 얼마나 있지?"

"저랑, 젊은 순경 하나... 이렇게 둘입니다. 아, 저번에 보내주신 로봇견 두 기도 있고요."

"... 조만간 인간형 로봇도 보내지. 우선, 그쪽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연구소장의 행방부터 찾아봐. 알겠나?"



모니터가 꺼졌다. 긴장이 풀린 K 서장은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고, 제복의 단추 두어 개를 풀어 젖혔다. 하지만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은 여전했다. 그는 세상이 꺼질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 밤이 떠올랐다. 가족과 화상 통화를 하던 중, 경찰견이 보낸 긴급 알림이 도착했던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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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내일 다시 연락할게.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시간에 출동할 일이 있어? 밖에 눈이 많이 오던데, 몸조심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아내와 딸에게 인사하며 K는 통화를 끊었다. 그는 재빨리 외투를 걸치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것들. 실험체를 꼬셔놨으면 조용히 데려가지. 왜 또 사고를 쳐서 야밤에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커다란 수레와 도구를 챙긴 그는, GPS 좌표를 따라 눈보라를 뚫고 달려갔다.



도착한 골목은 지옥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나이 든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사체, 거대한 사람의 몸뚱이와 잘려나간 팔다리.

"아니, 어떻게 이렇게 토막을 잔뜩 내놓은 거야... 응? 이건 뭐야..."

핏기 없는 살점 위로, 익숙하지 않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토막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심하게 훼손된 피부 위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낙서?... 설마 꽃을 그린 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토막에도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선이 비틀리고 번진, 아이의 그림 같았다. 오랜 경찰 생활, 무수한 현장을 봐 왔지만, 이건 달랐다. 잔혹함과, 유아스러움이 공존한 끔찍한 광경. 그는 숨을 가다듬고, 장갑을 낀 손으로 사체를 하나씩 수레에 옮겼다. 핏자국이 묻은 눈을 삽으로 퍼 담으며 중얼거렸다.

"왜 이런 일이... 왜 하필 내가 담당하는 구역에서..."

주사를 맞은 육체를 종이 오리듯 자르고, 변태적인 시신 훼손까지 범한 끔찍한 범죄. 심지어 완력을 위해 연구소가 개조한 인간인 '망치'를 상대로 벌인 일이다. 상부에 뭐라고 보고를 올려야 하지? 전동 수레의 바퀴가 눈에 처박히듯 무겁게 밀렸다. 등은 식을 새도 없이 흐르는 땀에 흠뻑 젖었다. 한발 내디딜 때마다 피곤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이유...

그는 알고 있었다. 더 피곤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건 없던 일이다. 내가 조용히 처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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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같은 놈이야."

그날 아무도 모르게 덮어버린 사건. 그때 뿌리친 찜찜함이, 연구소장 실종이라는 거대한 악재로 돌아오고 말았다. 머리를 감싼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