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누가 총을 쥐고 있는가

by 꿀꾀배기


'괜찮습니다. 전 이번 작품들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오픈전에 적당한 작품을 보여준다면 여론을 천천히 돌릴 수 있을 겁니다.'

... 그래. H의 말이 맞다. 굳게 형성된 사람들의 취향을 너무 한순간에 공격한 탓에 반향이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럼, 이제 어떤 그림을 그리면 좋은가?



다시 붓을 잡고 고전회 취향의 그림을 그려 그들의 환심을 사야 하나? 그렇다면 모작 제안을 수락한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하지만 P도 그런 말을 했다. 어떤 방식이든 일단 등단을 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를 바랐다고. 내가 원하는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더 큰 이익을 위해 사소한 건 감내하고, 미래의 진격을 위한 일 보 후퇴를...

X발, 말 같지도 않은 자기 합리화. E에게 일갈하던 과거의 나에게 부끄러운 줄이나 알아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대중적인 작품을 통해 여론을 돌릴 수 있을까? 그런데 대중적인 게 뭐지? 쉘터의 사람들이 내 어떤 부분을 보고 열광했을까? 옷? 내 클론들이 한가득 생겨났던 걸 보면 일리가 있다. 아예 패션쇼를 열어볼까? 모델을 섭외하고, 디자인을 완성한 다음엔 그대로 의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게 이게 맞나? 그림이 좋았기 때문에 내 착장도 관심을 받은 것이라면? 내 추종자들은... 그들은 내가 뭘 하든 전부 좋아할 것 같다. 합리적인 판단에 방해된다.



잠시 작업실 안을 둘러봤다. 물감을 뿌리고, 튀기고, 온갖 시도를 하느라 알록달록 엉망진창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 저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 예술에 저급과 고급이 있단 말인가...? 인간 사이에도, 저급한 자와 고귀한 자가 따로 있다는 건가? E 구역에 다시 갔을 때를 떠올렸다. 탁한 공기,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회색빛의 똑같은 건물 더미들... 난 분명 그곳이 싫었다. 숨을 쉬는 자체로 불쾌했고,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미 쉘터의 사람이 되어버린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 선민의식에 찌들어버린 건가? 그렇다면, 내가 그 E 구역의 노동자였을 때는 어땠나? 나는 내 일을, 동료들을 어떻게 생각했나? 쳇바퀴 도는 것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그들이 한심하고, 멍청하게 살아가는 짐승들이며,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달리 통일 지구의 속셈을 꿰뚫고 있으며, 너희 같은 개, 돼지들이랑은 다른 사람이라고...



아... 그래.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정하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원망하던 저급한 E 구역을 떠나 무려 쉘터에 가서, 그 일원이 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들의 체제가 부수고 싶고, 조롱을 던지고 싶었던 걸까? 정작 지금의 나는 E 구역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쉘터의 사람도 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아니, 그 어느 곳도,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미술에 발을 들인 계기가 무엇이었나? 여러 일이 있었지만, 난 그것을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때문이었다고 정리했다. 이 눈. 미적 직관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이 눈 때문에, 이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맸다. 더 나아가, 내가 그걸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게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간 이유였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손으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아우라를 믿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인가? 나는 인간 찬가를 외치고 싶었나? 왜 그랬을까? 누구보다 타인을 혐오하는 내가...?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고 싶다'

P 교수에게 들었던, 내가 했던 말. 난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름답다던 쉘터도, 내 이상의 세계는 아니었다. 평생 찾을 수는 있는 건가?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정말로 창조해 낼 수는 있는 건가? 그게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붓은 그것을 쥔 사람을 투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나 감상을 꾸며내려는 사람, 스스로를 의심하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쥔 붓에서는 선명하고 깨끗한 색채의 그림이 완성될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예술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허공을 더듬는 내 붓을 보니, 백번 맞는 말이다.






그렇게 두 달을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다.




단 한 점의 작품도 완성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오답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쩌면 P 교수의 말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정답이라는 거, 지금의 내 안에는 없을지도...




다음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H가 내 작업실에 방문했고,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일단, 씻고 잠이라도 주무시죠.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냥 그의 말을 따랐다. 너무나도 많은 생각을 해버린 나머지 뇌의 회로가 전부 타버린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꿈을 꾸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에 가서 세면대에 두 팔을 얹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물감이 온몸에 더럽게 묻어 있었고, 코에서 흐른 피가 인중을 타고 턱 밑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내 피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끼니를 제대로 안 챙겼던가? 모르겠다. 지금 거울 안에 비친 사람이, 내가 맞기는 한 건가?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깊은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에 H가 있었다.

그는 내가 그리다 집어던지거나, 부숴버린 캔버스 더미 앞에 앉아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전보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바싹 말라버린 목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집사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여전히 내 사인이 적힌 그 안드로이드는 물을 가져와 나에게 건넸다. 나는 물을 받아 단숨에 삼켰다. 진득하게 굳어있던 혈관이 조금씩 흐르는 느낌이었다. 손발 끝이 저릿했다.



"나는 당신의 예술이 좋습니다. 이곳의 그 누구도 내게 이런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하지 못하니까요." H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이 쉘터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죠. 사실 제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전 단지 특별하고 아름다운 당신의 예술만을 얻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잘생기고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이든, 골방에 썩어가는 쥐새끼 같은 몰골이든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다만..."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바닥의 캔버스 조각을 발로 툭 찼다.

"당신의 예술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가 되겠죠. 전 당신을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심각해 보이네요. 무엇이 문제인가요? 제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십니까? 말만 하시죠."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그 순간, 불현듯 어느 기억의 단편이 떠올랐다.

"... 나를 고인 늪에 집어던지고 싶다고 한 사람, 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고... 했는데. 당신이 한 말인가요?"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저는 아닙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던가요?"

"누구였는지... 아, 머리 아프다... 어쩌면 그것도 꿈이었나 봅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G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이... 체제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H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누군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사회성에 기인하는 알량한 도덕적 심리 때문이라면..."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이 세상을, 스스로를 잘 모르는 겁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총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그럴 힘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정의, 법, 도덕성도 마찬가지. 그것들은 불변의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책에 적은 어떤 글에 불과하죠. 슥슥, 지우고, 새로 쓰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저는 어떤가요? 그럴 힘이 없어 보이나요? 당신은 어떤가요? 아직도 본인이 E 구역의 노동자 따위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럴 리가 없죠. 나를 현혹시켰던 건, 당신의 그 끝을 모르고 높게 치솟았던 자신감과 확신이었으니까. 그러니까, " 열변을 토하던 그는 내게 더욱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사로운 것들에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무엇을 말하든, 전혀 귀담아듣지 마세요. 타인을 의식하지 마세요. 나약한 자들이, 당신을 움직이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하세요. 당신의 감각을 믿으세요.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판단한 다음 행하세요. 당신의 손에 쥐어진 게 무엇인지 제대로 직시하고...


방아쇠를 당김에 주저하지 마세요."




그는 숙였던 몸을 일으켜 다시 중앙으로 걸어갔다. 집사에게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와 얼룩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어쩌면 과거의 공간을 다시 가보는 게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오픈전에 당신의 명단을 제외했으니, 작업 생각은 잠시 멈추고 환기라도 해보시길."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작업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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