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던 나머지 줄곧 머릿속이 뿌옇게 느껴졌다. 게다가 리얼 월드 이후로 무뎌진 감각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면, 혼란스러운 정신도 맑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작업실로 돌아와 우선 주변을 정돈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집사에게 문밖에서 다른 안드로이드의 이동이나 사람의 출입을 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아 붓을 크기별로 테이블에 분류하고, 물감도 순서대로 정리했다. 주변 환경이 통제되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적당한 사이즈의 붓을 들고, 팔레트에 붓을 가져갔다.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중앙으로 돌아와서, 왼쪽으로 밀어낸 다음,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묘한 색이 묻은 붓을 팔레트에서 떼어 낸 다음, 캔버스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작업은 끔찍했다. 오늘따라 붓질에 실수가 잦았고, 눈이 이상한지 원하는 색감의 물감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감각적인 터치를 시도하면, 전부 혼자 동떨어진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붓을 들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내내 잡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유가 내 손안에 있다고 믿었는데, 붉은색에 어떤 비율로 파란색을 섞어 봐도 원하는 색이 나오지를 않았다. 우연을 의도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내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그녀의 향이 떠오르질 않았다. 따스하고 싱그러운 꽃잎의 향, 이후 쓰고 축축한 안개가 가라앉고, 그 속에 드러나는 강렬한 스파이스... 문장으로만 구성될 뿐 그 향이 코에 스치질 않았다.
아, 왜 그녀를 떠올리고 있는 거지? 집중하자, 집중...
어쩌면, 너무 형식에 얽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술이 반드시 붓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딱딱하게 생각하니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황폐해지는 것이다. 고전회? 같잖은 일이다. 까마득히 먼 과거의 거장들처럼, 붓으로 고상하게 캔버스를 비벼대고 있어야 고결한 예술인가? 고결한 예술을 즐기는 고결한 본인에 지나치게 취한 것 아닌가? 애초에 예술이 왜 고결해야 하는가? 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악착같이 피어난 들꽃이, 정원사가 공들여 가꾼 꽃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이쯤 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혐오스러운 인간들. 왜 그렇게 품격을 찾고, 품위를 찾고, 수준을 운운하겠는가? 왜 세상을 쉘터와 중심 도시, 외곽 지역으로 나누겠는가? 그들에겐 이 세상에 위아래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모두가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린 적이 없는 거다. 그들만의 견고한 쉘터라는 성을 만들어 넘을 수 없는 벽을 치고, 그 밖의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든 물에 가라앉아 죽든 관심도 없을 게 분명하다. 사람의 존엄성에 위아래가 어디 있나? 예술에 저급과 고급이 어디 있나?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이 인간적이지가 않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었다. 형식적인 허구로 가득하다. 내 안에 억눌려있던 파괴 욕구가 들끓었다. 그러자 이제야, 모든 감각이 온전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고전적인 그림은 너무 평면적이다. 입체적으로 여러 면을 한 작품에 담을 수는 없을까? 붓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초점을 한 폭에 담아냈다. 캔버스에만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시꺼먼 밤하늘을 비추는 유리창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려냈다. 밖에 누군가 지나가거나, 날씨가 변할 때마다 이 작품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낼 것이다. 어차피 붓과 물감 모두 공장에서 만드는 공산품인데, 다른 공산품은 작품의 도구가 될 수 없나? 방문을 열고 안드로이드 집사를 데려와 그의 몸통에 내 사인을 적었다.
"넌 이제 내 작품이야. 마음에 들어?"
집사는 당황스러운 듯 머릿속으로 연산을 지속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반드시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예술이라는 법은 없잖아?"
내가 안드로이드에게 어떻게 그려라,라고 세세하게 요청해서 그림을 그려내면, 그건 안드로이드의 그림인가, 내 그림인가? 누구의 그림인지가 중요한가? 고전회라는 작자들이 모작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원작이 아주 높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원작이 높은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높은 품격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변질될 것이라면, 원본성은 없어지는 게 낫다.
나는 고전 인물화를 프린트하여,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그렸다. 또, 안드로이드 집사에게 물감이 가득 찬 통을 쥐여 주었다.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통의 바닥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뒤에 집사에게 손을 아무렇게나 흔들라고 시켰다. 구멍을 통해 여러 줄기의 물감이 새어 나왔다. 물감 줄기들은 안드로이드가 불규칙적으로 흔드는 동작에 맞춰 춤을 추며 캔버스에 쏟아졌다. "감상도 예술의 일부니까, 알아서 해석해 보라지."
아이디어가 술술 쏟아지자 흥이 잔뜩 오른 나는 한 달 만에 열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모든 작품을 확인한 H는 파격적이고 놀랍다며 기뻐했다.
"이건 다음 갤러리 오픈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이 작품들만 모아 아예 새로운 전시를 열어 세상에 공개해야겠습니다."
새로운 전시회는 일사천리로 계획되었고, 다음 시즌의 오픈에 앞서 빠르게 공개되었다. 전시회에 맞춰 나는 새로운 양복을 의뢰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하의 핏과, 구두를 적당히 덮는 기장감. 그에 맞춰 구두도 앞코가 둥글고 뭉뚝한 디자인으로 직접 주문 제작했다. 웃옷은 빛바랜 색감의 가죽 재질로 만들고, 넥타이 또한 색감을 맞췄다. 새로운 스타일로 석상에 나서자 내 추종자들은 열광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인사를 건네며 갤러리 내부로 향했다.
그런데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저번 오픈전에서 거의 사라졌던 과한 장식과 풍성한 의복을 걸친 사람들이 다시 늘어난 듯했다. 그들은 여전히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보러 와도 되지 않나?' 속으로만 생각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작품이 전시된 메인 홀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파격적인 작품 양식과 새로운 복장 덕에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나는 대충 손인사를 건네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H와 M, D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거의 목도리도마뱀처럼 넓은 넥 카라 사이로 얼굴이 파묻힌 M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번 작품도 잘 봤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셨는지...?" 내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본 게 맞는다면, 이건 우리 쉘터를 모욕하는 처사로 보면 되겠지요?"
"... 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H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 역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관중들 사이에서 원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예술이냐?"
"쉘터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를 만만히 보는 게 분명해."
"E 구역 출신이라더니, 보자 보자 하니까 하는 짓이 가관이군."
갤러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가득했고, 흥분한 관객들이 몸싸움을 벌였다. 당황스러웠다. 그때 D가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저런, 예술을 우습게 아는 모양이군요. 예술은 이깟 애들 장난 같은 게 아니거든요. 아, E 구역 출신이라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분위기를 따라 조금 상기된 내가 말했다. "그럼, 예술이 뭔데? 당신들의 예술은 그렇게 으스댈 정도로 위대하신가?"
D가 피식 웃었다. "아무렴, 당연하죠. 예술과 창조는 위대하고 숭고한 것입니다. 창조자로서 작가의 조형 의지도, 시각적 아름다움도 배제해 버린다면 그게 어떻게 작가이고 예술인가요? 그래서 당신 눈에는, 당신의 작품이 아름답게 보이나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네요."
수많은 인파 사이 과하게 언성을 높이는 자들, 전부 모가지에 보석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고전회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을 형성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H는 비서들을 불러 내가 자리를 피하도록 했다.
나는 비서 둘과 함께 갤러리 안쪽,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으로 몸을 대피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사이, 두 비서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한 명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은 비서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G였다.
"아, 속이 후련하네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또, 누구라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저번 전시를 보고 마음이 많이 꺾였습니다. 내 수준을 아득히 넘는 인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오늘 그 생각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뭡니까, 저 해괴망측한 것들은?" 그가 내 옆으로 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당신처럼 선민의식에 찌든 인간들의 같잖은 체제를 우롱하는 거지. 예술은 고귀하지 않아. 인간도 마찬가지고... 식견들이 좁아서 좀처럼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슬슬 호흡이 진정되어 말이 편하게 나왔다.
G가 앞으로 걸어 나와 다시 내 앞으로 섰다. "아뇨, 인간은, 고귀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겠습니다. '쉘터의 인간'은, 고귀합니다. 제 눈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식견이 좁아 보이는데요. 마치 이 세상이 자신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는 듯이, 피해의식에 찌들어 자신의 무능을 변명하고.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온갖 부정적인 사고만 반복하며 포기하고, 남 탓만 주야장천 늘어놓고..."
"그래,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잘난 쉘터의 인간들만 고귀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전부 죽어도 싸고... 위선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네." 내가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러자 G는 무릎을 구부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당신은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세상의 규칙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나요? 왜 그럴까요? 자연의 섭리도 자본이 정하는데. 중앙 농원을 보셨죠? 전쟁으로 무너진 이 세상에, 쉘터가 피워낸 생명의 바다. 그건 누가 만들었을까요? 멍청한 노동자들이? 아니, 쉘터의 연구자들이 만들었죠!
외곽 지역의 사람들이 죽어도 싸냐고요? 아, 당연히 그렇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그 존재 가치를, 삶의 연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비의 합당성을 매 순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세계에 빚을 지는 만큼,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 생존의 당위성을 인정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쉘터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의 99.9퍼센트는 완벽히 재활용됩니다. 폐수는 말끔히 정화하고, 버려진 음식물은 모두 분해한 다음, 자연으로 돌려보내 새로운 씨앗의 양분이 되죠. 우리가 만들어내는 쓰레기는 다시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우리가 땀 흘려 만들어낸 기술로 말이죠!
반면, 중앙 도시 밖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저 소비밖에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굼벵이들입니다. 로봇보다 쓸모가 없는 인간들. 노력 이상의 것을 얻고 싶은 생각뿐이니 복지 시설이라는 허상에 취해 전부 무너지고 말았죠. 에너지바가 주식인 덕에 그나마 쓰레기가 줄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오, 그 에너지바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어때요, 이래도 인간이 모두 같습니까? 모든 인간의 생명이 존엄합니까?"
나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예술이 쌓은 이 체제를 무너뜨리고는 싶은데, 작품을 내걸 곳은 체제의 산물인 갤러리뿐이군요. 이제 그만 인정을 하란 말입니다. 당신은 쉘터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지요, H 님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으니! 누구보다 수혜를 받을 수 있는데 왜 그걸 마다합니까? 혹시 지능이 낮은 겁니까?"
G는 아무 말이 없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답답한 인간. 조만간 H 님이 연락할 겁니다. 그전까지 별장에 처박혀서 쥐 죽은 듯이 지내시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