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꽃은 어디서나 피어난다

by 꿀꾀배기


"통일 지구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E 구역 살인사건은 최초 보고대로 피해자들 간의 난투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X 연구소 소속이었던 고 미스터 **이 가게를 운영하던 중, 전 상사였던 4 연구소장을 보자 앙심을 품고 공격, 이에 같이 있던 연구소 직원들과 손님까지 싸움에 휘말렸고, 결국 모두 사망하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한 경찰이 '범인은 따로 있다'라며 난동을 부려 화제가 되었으나, 이에 대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해 단순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경찰 측은, 추가적인 수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CCTV가 거의 없는 데다가 알리바이를 입증할 사람도 없어 난항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CCTV도 작동하지 않는다니 완전히 무법지대가 따로 없어요."

"질 나쁜 사람들이 몰래 우리 구역으로 넘어오면 어떡해요. 관리도 잘 안된다는데..."

"어차피 남아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던데, 그냥 폐쇄했으면 좋겠어요."



"네티즌들의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통일 지구 신문고 사이트에는 E 구역 폐쇄 청원이 올라왔으며 이에 찬성하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미스터나인에서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T는 어떤 반응이었을까. 아직도 진범을 찾아보겠다며 헛손질을 하고 있을까? 아무튼 다행이었다. 경찰이 나나 살인자를 찾아 수사를 이어갔다면 피곤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뭐, 이젠 큰 의미는 없다.

목적지에 도달한 스포츠카가 운전을 마치고 정지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고 나는 몸을 일으켜 차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네모 반듯한 건물이 서있었다. 제2 아카데미였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올라 입구에 다다랐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쉘터의 진짜 아카데미를 들렀다. 진짜 아카데미는 부지의 크기부터 차원이 달랐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작은 정원으로 이루어진 제2 아카데미와는 달리, 그곳은 6개의 웅장한 건물이 넓은 부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간에는 무인 셔틀이 학생들을 운반하고, 거대한 공원과 운동장도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예술을 즐겼다. 그들에게 예술은 어떤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놀이였고, 즐거움이자 휴식이었다.

반면 이곳의 학생들은 여전히 좁은 방에 둘러앉아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교육 커리큘럼 자체가 모작을 위해 구성된 모양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어떻게 그리느냐에 대한 교육만이 이루어졌다. 선을 올곧게 긋는 법, 색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법, 거장들이 썼던 표현기법과 마감 방법...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교장이 따로 불러내어 모작을 그릴 것을 권유하고, 거절하면 나처럼 쫓겨나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유명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자들이 얼마나 될까?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자가 있긴 한 건가?



복도를 걷다가 어느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 있었다. 내 첫 담임이자, 마지막 담임이었던 P 교수였다. 그는 나와 눈이 몇 번 마주쳤고, 처음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이쪽을 쳐다봤다.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수업이 종료되고, 그는 자리를 정돈한 다음 교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J, 맞니...?"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내가 인사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기억을 곱씹는 듯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옷도 그렇고... 어떻게 지냈니?"

나는 그에게 쉘터의 H 갤러리의 작가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예술의 길을 놓지 않았다니 정말 기쁘다. 넌 처음부터 재능이 있는 아이였어. 난 알 수 있었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하네요. 비록 아카데미에서는 쫓겨나고 말았지만." 내가 웃으며 말했다. P 교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 그땐 막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어. 다만 그렇게라도 등단을 해서, 너의 작품 활동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히 유명 갤러리의 작가가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야. 그래, 어떤 작품을 하고 있니?"

"아카데미에서의 통제된 교육은 저를 새장 속에 가두었지만, 저는 결국 형식을 벗어남으로써 길을 찾았어요. 순수한 욕망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제가 추구하는 이상이 있었습니다."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잊고 있던 추억 속의 동기들에 대한 이야기, 제안을 받지 못한 많은 학생들은 결국 공장이나 원래 배치된 업무로 돌아간다고 했다. 교수는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앞으로의 인생에 예술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이어갔다고 했다. '아름다웠던 세상의 재현'이, 아카데미의 본질이었으니까. 그는 '나만의 방법으로 세상에 꽃을 심고 있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그에게 바다를 그리는 법을 물었다고 했다.

"나는 '어느 바다를 말하는 것이냐'라고 물었고, 너는 순례 캠프에서 보았던 바다 그림에 대해 말해주었지. 그래서 나는 그날 본 바다를 재현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 순간의 감상을 담아내고 싶은 건지 되물었어. 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잘 모르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고 싶다'라고 했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 '나도 그렇다'라고."

그는 우린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며, 정답은 우리 안에 있으니 그걸 발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이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캠프를 갔던 것도 같고, 그곳에서 어떤 그림을 본 것도 같은데, 그게 바다 그림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살인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교수 P와의 시간은 의미 있었다. 오랜만에 옛 기억도 되살려보고, 서로 같은 관심사를 두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그는 떠나기 전에 내게 포옹을 하며 언제든 놀러 오라 말했다. 안정감을 주는 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따스한 봄의 꽃향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주변엔 꽃이 한 송이도 없었다. 무언가 익숙하고 그리운 듯한 그 향기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급하게 P와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꽃향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고 도망치듯 차 안으로 들어갔다.



쉘터의 별장으로 목적지를 입력하고, 돌아가는 동안 나는 P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변수를 통제하는 법을 알기에, 변수를 활용할 수 있는 거란다. 우연히 작품을 완성한 사람을 초짜라고 한다면, 우연을 의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단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따라 노을에 자꾸만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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