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사계의 시작은 봄

by 꿀꾀배기


"따란!"


팔을 양 옆으로 힘차게 뻗으며, 고개를 치켜들고 엔딩 포즈를 취했다. 뜨거운 땀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 따라 가슴팍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이야말로, 아름다운, 나의 피날레.



"어때, 이 자세?"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나?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작은 무대 위, 조명은 여전히 나를 밝혔고, 관중석에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없어?"




내 물음은 공허한 혼잣말이 되어 사라졌다.




"어디 갔어?"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누굴 찾고 있는 거지? 난 원래 혼자 아니었나?




"아무래도 꿈인가 보다."




묘하게 일렁이는 시야, 흐린 초점, 지끈거리는 머리... 꿈속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무대에서 걸어 내려왔다. 조명은 여전히 무대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막은 내리지 않았으니, 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쓰러진 사람들, 거리는 침묵으로 가득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 생각났다. 내가 모두 죽였구나.




그러자 길가의 시체들은 꽃이 되어 피어났고,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고, 나무가 되어 푸르게 자라났다.


내 감각적인 터치를 통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가 된 사람들.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나는 거리를 걸으며 감상에 젖었다. 꿈꾸던 햇살과 바람... 그토록 원하던 이상, 타인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세상.


'나'를 '너'로 만드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제야 나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 대해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래야 할 텐데. 왜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세상은 조용하고, 완벽했다. 그렇다면 지금 속이 텅 빈 듯한 이 허무함은 무엇 때문일까?


여전히 '나'는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을 제거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는데, 그에 따라 수많은 감정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 세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혹시, 지금도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째서?


그렇게 염원하던 걸 이루었는데, 어째서...?




...




알았다.


타인에 대한 원망과 혐오. 그것은 진정한 이상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나의 욕망이자, 동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욕망을 잃었다.




"아, 그런 거구나..." 나는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다.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도, 심금을 울리는 연극도...


관객이 없다면, 그냥 쓸모없는 어떤 행위일 뿐이었다.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연구하고, 피 흘리며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나는 이제 노동자가 아니었다.


예술가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해야 하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계속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정말 기나긴 시간을 걸었다. 난 여전히 같은 곳을 걸었지만, 긴 시간이 흐르며 이곳은 어느새 숲이 되어 있었다. 여러 줄기가 비틀리며 자라난 수많은 나무. 그것들은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다섯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복지 시설에서 봤던 나무껍질들처럼...


나무의 밑동을 보았다. 찢어진 천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다가가 그 천 조각을 들었다. 그건 옷이었다. 그 나무가 입고 있던.




이들은 내가 죽인 시체들이었다.




그들은 나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연의 순환 섭리에 따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이 파괴한 초록의 세계를, 인간이 한 몸 바쳐 다시 일구어내고 있었다. 푸른 이파리들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냈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걸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노란 꽃이 핀 어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타오르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봤다.




노을.


노을은 아름다웠다.


어쩐지 그립고, 뭉클한 기분...




노을은 뜨겁게 타오르며, 나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온몸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포근하고, 따사로운 꽃의 향기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손끝부터 가슴까지 천천히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물줄기는 내 뺨을 타고 흘렀다.




"너야...?"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누구를 부른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격한 그리움의 감정이 가슴을 뚫고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그것이 모두 쏟아질 수 있도록 두었다.






뛰는 가슴을 조금씩 추스르고,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그리움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나는 그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붓으로 벽에 그림을 그렸다.




노란 머리끈을 묶은 한 단발머리 여자.


그녀는 그 벽에서,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밝게 웃어주었다.


그 앞에 선 나무 아래에는 노란 들꽃이 한가득 만개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나무 옆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내가 벽에 그린 여자와 많이 닮은 그녀는, 그림처럼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안녕, J."






그녀의 뒤로 노을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노을은 곧 저물겠지만, 내일도 내 앞에 찾아와 세상을 물들일 것이다.




드높게 떠올라, 뜨겁게 세상을 밝히고, 기꺼이 타오르며 사라진다.


잠시 어둠이 찾아와도, 내일이면 다시 떠올라 타오를 것이다.


아름답게...




어쩐지 손끝이 저릿했다.






"... 안녕."






내일의 노을을 보기 위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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