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바람이 찬바람과 적당히 섞여서 불어오던 나의 열두 번째 봄날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봄 소풍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소풍은 가까이에 있는 북한산이나 또는 어린이 대공원을 주로 갔었는데 내가 가본 적 없고 역사책에서 몇 번 읽었던 강화도로 간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그때도 몸이 약해서 버스나 택시를 조금만 오래 타도 멀미를 했던 나는 엄마에게 소풍이 가기 싫다고 말했다.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담임선생님과 의논 후에 그래도 나를 친구들과의 추억 쌓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소풍을 보냈다. 나는 버스에서 고생할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정말 강화도까지 소풍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와 선생님의 권유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소풍날 나와 반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 안에 있는 관광버스 안에 올랐다. 미리 멀미약을 먹은 나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잠을 잤다. 고속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바람에 나는 몇 번 잠에서 깼지만 그래도 무사히 강화도까지 도착을 하였다. 나는 약간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다행히 멀미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몸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다. 강화도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이 몇 번 나에게 와서 나의 이마에 손을 대고 몸 상태를 체크하고 갔다. 버스는 강화도에 도착을 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줄을 섰다.
우리가 내린 곳은 강화산성이었다. 굵은 돌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돌담 중간에 하늘로 치솟고 올라갈듯한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기와집 아래에 아치형 모양으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있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걸으면서 고려시대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은 짙은 파란색을 보여주었고 파란색 하늘 사이로 초록의 나뭇잎을 가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예쁘게 보였다. 선생님은 나를 고려시대로 인도해 주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나뭇잎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와 아이들은 강화산성 안쪽을 걸어 다니면서 봄날의 기분을 느꼈다.
강화 산성을 어느 정도 둘러보았을 때쯤 아이들이 목이 마르다고 했고 선생님은 우리를 근처 약수터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을 마셨고 나 역시 목이 말라서 물을 조금 마셨다. 갈증이 해소된 아이들과 나는 돗자리를 펴고 집에서 엄마가 정성껏 김밥을 만들어준 도시락을 먹었다. 햇살은 덥지 않았고 바람은 내 뺨을 쓰다듬듯이 살랑거려서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수다 떨면서 먹는 점심이 맛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다시 강화 산성 안으로 돌아와 이전에 못 본 곳을 다시 둘러보려고 걸어 다녔는데 갑자기 나는 속이 메슥거리고 명치가 아팠다. 나는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고 이마와 등 뒤로 땀이 났다. 나는 선생님께 아픈 사실을 말했고 선생님은 점심 먹은 것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걱정하면서 소화제를 챙겨주었다. 소화제를 먹어도 아픈 통증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커서도 여행지에서 종종 물갈이를 해서 지금 나의 짐작으로는 그때 소화제도 잘 듣지 않은 것을 보면 물갈이를 한 듯하다.
내가 아파서 선생님께 고속버스 안에 들어가 있겠다고 말을 하고 버스 안에 올라서 쉬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고속버스 안에 들어가 있는 내가 마음이 쓰였는지 버스 창 너머로 선생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쳤고 선생님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버스에 오른 선생님은 나에게 걸어와서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아까보다는 괜찮은 것 같지만 여전히 아프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걸어 다니기 힘들 것 같냐고 물었고 나는 걸어 다니기는 많이 힘들 것 같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업어 줄 터이니 아이들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지만 선생님이 소풍날에 아이들이랑 사진도 함께 찍어야 하는데 세월이 흘러서 선생님이 사진을 볼 때 사진 속에 내가 없으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버스에서 나와 함께 내려서 나를 업고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선생님은 키가 165센티정도 되었고 몸은 말랐었다. 20대 중반 정도 되는 나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여자이고 기운이 없을 텐데 선생님은 그때도 잘 먹지 않아 말랐지만 그래도 몸무게가 30킬로가 조금 넘었던 나를 업고 반나절 동안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항상 맞벌이를 하였던 나의 엄마는 늘 바빴고 내가 첫째이기 때문에 동생이 있어서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엄마에게 업혀서 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나에게 선생님의 등은 따뜻하고 안정감 있게 편안했다. 계속 나를 업어주는 선생님께 미안해서 나는
"선생님 죄송해요 내가 많이 무겁죠?" 라고 말을 했다.
그녀는 "아니야 우리 프라하의 별은 하나도 안 무거워, 선생님은 힘이 아주 세서 괜찮아" 라고 대답을 했다.
강화산성 안에서도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선생님은 나를 업고 걸었다. 소풍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만 나를 내려주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업어달라고 할 때 아이를 업고 걸으면 많이 무겁지만 아이가 예뻐서 또한 아이가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플까 봐 내가 힘든 건 참고 아이를 업어 준 적이 많았다.
나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나처럼 그러한 마음이었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봄소풍 단체사진에 계속 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