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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일까? 의심일까?

by 주원

스마트 패드가 도착했다. 최근 아이들 휴대폰을 바꾸어주고 스크린 타임을 명분으로 산 것이다. IT 기기를 워낙 좋아하는 남편에게 이 티끌만 한 이유가 확실한 명분이 되었다. 신이 나서 주문하려는 남편에게 나 주려면 사고 아니면 말라고 했다. 이미 남편은 업무용으로 가지고 있는 패드가 있었고, 전에 남편이 언제고 내게 새것을 사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외출하고 다녀온 사이 도착한 택배를 남편은 임처럼 반겼다. 내가 씻는 사이 패드는 포장을 다 벗어버리고 식탁에 놓여 있었다. 남편에게는 아마 새신부보다 곱게 보였을 거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으로 패드를 들어 내게 건네주며 남편이 말했다.


"정말 필요한 거 맞지?"


물욕, 특히 전자기기에 관심이 없어서 남편이 쓰다 질린 것을 물려받은 적이 여러 번이다. 뭐든 남편이 원하면 다 양보하는 나였다. 남편은 이쯤 되면 내가 웃으며 자기에게 양보해 주리라 기대했을 거다.


"그럼! 이 기회에 디지털 드로잉도 배워보려고."


마지막 기대감이 사라진 남편의 표정은 사탕을 뺏긴 아이 같았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다음 날 출근한 남편이 새 기기는 등록을 해야 한다며 바로 통신사 매장에 다녀오라며 채근했다. 사실 남편이 워낙 이쪽에 관심이 많고 나는 그렇지 않다 보니 연애하고 결혼하는 동안 나는 혼자 휴대폰 한 번 개통해 본 적이 없었다. 휴대폰도 최신 기능 탑재가 무색하게 기본 기능만 겨우 쓰는 나다. '까짓 거 금방 다녀오지.' 전에 쓰던 패드와 새 아이패드를 들고 호기롭게 통신사 매장 문을 열었다.


내가 직원에게


"기기 등록이란 걸 해야 한다던데요." 하고 묻자 직원은 usim만 갈아 끼우면 된다고 했다. 한 3초간의 정적이 흐르는 사이 나는 그저 멍청하게 있었다. 보다 못한 직원이 내게 패드 모델명을 물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디지털 문맹인(?)으로서 당당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본인 제품 아니세요?"

"제 것 맞아요."


직원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 같더니 이내 표정을 풀며 내게 새 패드를 건네달라고 했다. 그 사이 나는 얼른 남편에게 연락해서 모델명을 물었다. 다행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던지 남편이 대답해 주었다. 확인하고 바로 직원에게 말해주었다.


"00 패드 M5에요."

"아. 신규 모델이네요. 그럼 e-sim이 장착된 모델이라 온라인으로 등록해야 합니다. 패드 두 개 다 전원 끄신 후 제게 주세요."


알았다고 고개는 재빨리 끄덕였는데 전원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괜히 여기저기 패드만 만지작 거리던 내가 민망하게 웃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어떻게 끄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순간 직원이 눈을 치 뜨더니 다시 시선을 패드 쪽으로 내렸다. 입가를 살짝 오므리는 듯했다가 펴더니 내게서 패드를 건네받아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다.


"패드에 비밀번호가 걸려있네요. 풀어서 제게 다시 주세요." 하고 직원이 말했다.


'비밀번호?'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등줄기에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뭐였더라? 아니 비밀번호를 설정하기는 했었나?'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남편에게 다시 연락했다.


답장을 기다리며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나를 보는 직원에 얼굴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이번에도 답장이 금방 왔다. 패드를 받아서 비밀번호를 풀어 직원에게 건넸다. 내 것이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민망해진 나는 남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나 완전 구닥다리 됐나 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직원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야.'

'그래? 잘 몰라서 그러니 알아서 해주세요 하고 말해.'

'응. 그런데 내가 모델명도 모르고, 기기를 끄고 켤 줄도 모르고, 비번도 모르니까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어.'


'.......'


몇 초간 뜸 들이던 남편이 글을 썼다.


'당신이 훔쳐온 줄 아는 거 같은데?'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약간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10대 20대도 아니고 디지털 기기 모를 수도 있는데 이럴 일인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남편 메시지를 보고 생각해 보니 직원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고가의 제품을 들고 와서 등록을 해달라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뭘 물어볼 때마다 허둥지둥 당황하니 의심이 갈 수도 있었겠다 싶다.


남편의 농담반 진담반에 한결 기분이 나아지고 계속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남편에게서 '훔쳐 온'것은 맞다. 아마 남편은 잠시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 요망진 물건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났을 거다. 기왕 훔친 거 제대로 프로답게 활용해보려고 한다. 디지털 까짓 거 뭐 별거 있나?


여전히 속사정은 모른다. 내가 받은 것은 무시일까? 의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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