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에게 무슨 비즈니스냐고? 얘기를 들어보시라. 밖에서 원화를 벌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 역시 주부를 당당한 사회인으로 또는 직업으로 규정해도 될지 오래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주부도 직업이다. 주부가 숨 쉬듯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며 노동의 양도 강도도 절대 적지 않다. 그 일을 다른 인력이 대체할 경우 꽤 큰 비용이 든다. 그것은 주부 노동이 경제적 교환가치가 있음을 나타낸다. 서비스에 대한 비용이 직접 지불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 직업이나 비즈니스와는 다르다. 하지만 가족의 바른 성장과 행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계획성 있게 경영해 나가며, 성공할 경우 매우 큰 부가가치를 생성해 낸다는 점에서 주부가 하는 일은 비즈니스에 닿아 있다고 본다.
어차피 할 일 제대로 해보자 해서 시작된 나의 프로 주부 프로젝트였다. 열심히 한다고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잘한다고 해서 성과급이 지급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일터는 '가정'이었고 나의 클라이언트는 남편과 아이들이었다. 편의상 남편을 남자 클라이언트로 아이들을 작은 클라이언트라 칭하겠다.
주부의 주된 업무를 밥하고 애나 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두 단어 사이에 광대한 우주가 있고 가정은 그 우주를 유영하는 배(船)다. 배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가장이고 키를 잡는 건 주부다. 주부가 제대로 키를 잡지 않으면 배는 궤도를 이탈한다. 하... 운전이! 그렇게나 중요했다. 주부의 주된 업무가 의전활동이 될지 결혼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 남자 클라이언트는 차를 매우 좋아하고 운전도 좋아해서 어지간해서는 내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 (사실 전에 한 번 내가 운전대를 넘겨받은 적이 있었는데 남편은 1분 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내가 핸들 돌리는 것부터 공포였다나!) 아무튼 그 뒤로 나는 작은 클라이언트들의 의전만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게 골치가 여간 아픈 게 아니다. 일단 인원이 셋이고 각자 스케줄이 다르다 보니 하루 종일 운전대를 놓을 틈이 없다. 거기다 어린것들이 어찌나 보무가 당당한지 차에 타기만 하면 먹을 거 없냐며 거드름을 피운다. 간단한 과자나 사탕류는 상비해야 한다. 매일 같은 것만 준비했다가는 자질 논란이 생기므로 센스 있게 종류를 바꿔 구비한다. 작은 클라이언트들이 스케줄을 소화하시는 동안은 편안히 쉴 수도 없다.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도 넘는데 그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주로 장을 보거나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끝낸다. 가끔은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고 시트를 뒤로 젖혀서 쪽잠을 청하기도 한다.
주된 업무가 돌봄 서비스이다 보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남자 클라이언트는 어느 누구든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 오면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대접받고 싶어 안달이 난다. 세상에서 제일 꼴값이 돈 버는 유세라지만 나는 눈하나 깜짝 않고 응대한다. 틈만 나면 안기고 사랑한다고 외치던 작은 클라이언트 들도 뭔가 불편한 일이 생기면 모든 스트레스를 내게 푼다. 별수 없이 되뇐다. '나는 프로다!' 비즈니스에 감정을 개입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이다. 최대한 퇴근시간까지 버티는 것이 나의 목표다. 혹시 연장 근무를 하게 되면 근무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휴대폰을 켠다. 지난번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예쁜 것들 중에 제일 비싼 것을 클릭해 주문한다. ‘하. 오늘도 불태웠다.'
맡은 업무를 차질 없이 이행해도 가끔씩은 클라이언트들의 갑질에 당하기도 한다. 특히 먹을 것 갑질이 심하다. 클라이언트들의 건강을 위해 최대한 가공식품을 줄이고 신선한 원물 요리를 해서 식탁을 차린다. 기껏 두 시간 넘게 갈비찜을 했는데 내 눈을 피해 초코바를 드신 작은 녀석이 콧방귀도 안 뀐다. 퍽퍽하다니 딱딱하다느니 느끼하다느니 하는 트집을 해대며 상을 물린다. (사표 던지고 킥 한 번 날릴까?) 퇴근하자마자 팬트리에서 컵라면을 꺼내는 남자 클라이언트는 또 어떻고. 그러다 백날 중 하루 저녁준비가 소홀한 날은 귀신같이 알고 뭐 먹을 거 없냐고 묻는다.
수많은 갑질에 비하면 인센티브는 사소하기 그지없다. 잠자기 직전 나누는 짧은 포옹,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전부다. 그나마 작은 클라이언트들은 소소한 제 기쁨들을 나누어주는데 그것이 꽤 사랑스럽기는 하다. 숙제를 바로바로 해냈다거나 단원평가 100점 맞았다는 자랑들. 제 선물은 태산 같은 것을 받아놓고 내 생일에 예쁜 쓰레기를 한 아름 품에 안겨주며 뿌듯해할 때, ‘언제 이렇게 사람이 되었나.'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이런 날은 연장근무를 하더라도 화가 덜 나고 장바구니 뒤질 일이 없다.
프로주부에게 VIP는 시어머니다. 우리 어머님은 서론이 길기로 근방에서 유명하신 분이다. 본론 또한 짧지 않다. 결론만 듣고 싶은 것이 내 본마음이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나의 전문성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한 번은 추석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도 어머님은 길고 긴 서론을 꺼내셨고 나는 경청의 자세를 유지했다. 이름만 아는 어머니 지인이 순대국밥에 공깃밥 두 개 반 말아먹은 이야기를 애국가처럼 듣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막내가 소곤소곤 나를 불렀다.
“엄마. 잠깐만요.”
“응. 왜?"
“엄마 지금 할머니 말씀하시는 거 진심으로 재미있어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래도 할머니 말씀하시잖아.”
“엄마. 저는 하나도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얘기처럼 듣고 있어서 내가 이상한 건가 했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웃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프로 아니겠는가?
주부는 법정 근로시간이 준수되지 않는 극한 직업이다. 하지만 나는 퇴근 시간을 명확히 오후 9시로 정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루 종일 깔끔하고 다정하게 비즈니스를 했다면 9시 이후에는 칼같이 모드를 바꾼다. 퇴근 이후 안방 문지방도 못 넘게 한다. (연장근무 제외) 퇴근 시간 사수를 위해 강한 어조로 근무가 끝났음을 알리고 그에 순응하지 않으면 소리 지른다. 짜증 내고 화도 낸다. 물론 이런 행동이 서로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비즈니스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마 클라이언트들은 당장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해고 통지서를 작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이면 다시 고용될 것이다. 나는 대체 불가한 이 배의 선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