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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일 Apr 20. 2021

세 번의 불합격과 한 번의 합격

이건 마치 롤러코스터



 2013년 11월. 나는 내 생에 두 번째 수능 시험을 보았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14년도 수능 시험은 국·영·수가 A/B형으로 나뉘었다. A형보다 B형이 더 어려운 유형이어서 성적보다 실기에 더 신경을 쓰는 미술 입시생들은 대부분 A형을 선택했다. A형 시험 문제는 예상보다도 쉽게 출제돼서 나는 영어 1등급, 언어 2등급을 받았다. 11년도 수능을 망친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가고 싶었던 학교 중 한 군데는 성적이 100%가 반영되는 전형이 있었다. ‘다른 데는 다 떨어져도 거기는 붙겠지.’ 실기 시험 치르기 전에 내심 그런 짐작을 했다.

                     

 그리고 2014년 1월. 나는 세 군데의 학교에서 실기 시험을 치렀다. 세 군데 중에 두 군데는 완벽히 망했다. 그 두 군데는 ‘상황표현’이라는 유형이었다. 지문으로 주어진 상황에 상상력을 더해 자신의 그림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선 글들에서 말했듯이 나는 기초에 약했다. 배경과 인물을 그리는 실력이 기본으로 깔리는 상황표현은 나에게는 조금 어려웠다. 생각한대로 표현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나머지 한 군데는 12년 겨울에 편입 시험을 봤던 그 학교였다. 전년도에 입시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그 학교. ‘상황적 발상의 전환’은 주어진 사물과 상황을 자신의 그림체로 재미있게 표현하는 유형이다. 사물을 변형해서 그려야 하므로 현실 배경에 사람을 그릴 필요가 없다.     

          

 주제는 아래와 같았다.

상황: 가까운 미래, 무더운 날씨의 남미에서 기상이변으로 얼음비가 내리고 난 후 분주해진 거리의 모습(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그리시오)
대상물: 흔들의자, 진공청소기
의성어, 의태어: 동실동실
제한 조건: 사실적으로 표현된 인물 중심의 화면 구성을 지양하며, 반드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로 인식될 수 있는 형체가 표현되어야 함

          

 나는 미래의 지구를 그렸다. 가장 먼 배경엔 우주가 보이고, 남미를 무더운 걸 넘어서서 용암이 들끓는 곳으로 설정했다. 남미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남쪽 식물들을 그렸고 용암에 얼음들이 동실동실 떠 있는 걸 표현했다. 용암이 아닌 땅에서는 진공청소기처럼 생긴 외계인들이 얼음비로 인해 망가진 도로를 청소한다. 흔들의자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상처 입은 외계인을 옮기는 또 다른 외계인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 캐릭터를 그릴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바뀐 전형 덕에 나는 세 학교 중에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의 시험을 가장 잘 풀어냈다.

                    

 2월이 되자 하나둘 합격 발표가 떴다. 네 군데 중 가장 먼저 발표가 났던 건 실기 없이 수능 점수 100%가 반영되는 전형이 있던 학교였다. 내심 합격을 기대하고 있던 곳.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모니터에는 대기 번호 125번이라는 빨간 글씨가 굵게 쓰여 있었다. ‘망했다.’ 이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에게 쉬운 시험은 남들에게도 쉬웠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학교를 이만큼이나 많이 지원했을 줄이야. 나머지 두 학교는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3월이 다 되어 갈수록 나는 시든 이파리마냥 생기 없이 축축 쳐졌다.

              

  마지막 학교는,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발표가 드럽게도 늦었다. 날짜 뿐만 아니라 시간도. 3시인지 4시인지 애매한 늦은 오후. 나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합격자 발표 페이지에 들어갔다. 한 학교는 대기에, 두 학교는 불합격. 시험 본 직후에는 그래도 잘 본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학교였지만, 연이은 결과로 나는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새로 띄워진 창을 보고 눈이 번쩍뜨였다. 합격. 합격이었다! 나는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이야! 나 합격했어!' 소리 지르는 목 안 쪽이 덜덜 떨리고 당겨왔다. 내 외침에 동생과 엄마가 방에 뛰어들어왔다. 우리 셋은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살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축하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영문과 다니다 미술 입시라니. 일 년 만에 합격이라니. 어쩌면 잘 몰랐기에 했던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성공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합격 페이지를 닫고, 새 창을 열어 다니던 대학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자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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